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연 Mar 02. 2024

기내식은 오랜만이라

홍차를 포기한 사연

나와 동기는 잘 맞는 여행 메이트다.



우리의 첫 해외여행은 바야흐로 2018년 6월, 아름다운 석양을 자랑하는 코타키나발루에서다. 환상(어쩌면 환장)의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여자 둘이 여행을 간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다섯 글자로 귀결된다. ‘친해?’와 ‘안 싸워?’다. 물론이다. 우리는 친하고 안 싸운다. 정확히는 싸울 일이 없다.



코타키나발루의 석양과 칵테일 두 잔



우리가 싸우지 않는 7가지 이유

1. 쇼핑에 크게 관심이 없다.

2. 호텔은 깔끔하면 된다.

3. 초밥을 좋아한다.

4. 초밥과 고기 중엔 고기다.

5. 우동과 칼국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6. 둘이서 메뉴 3개를 시킨다.

7. 지금 같은 메뉴가 먹고 싶을지도 모른다.



구구절절 잘 맞는다는 아니, 잘 먹는다는 얘기다. 둘 다 맛있는 것 먹을 때 말고는 화도 잘 안 난다. 자주 메뉴 3개씩을 시키곤 하는데, 해치우는 것은 순식간이다. 여행은 타지에서의 낭만적인 의식주 생활이 아니던가. 결국 먹고사는 문제인 것이다. 낭만은 비행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법. 비행기의 낭만은 단연, 기내식이다.



선셋바 알프레스코. 둘이서 메뉴 3개는 기본이다.



9월 24일, 10:45.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니, 시계는 어느덧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온갖 기대와 걱정을 욱여넣은 캐리어는 왜 이리도 무거운지. 태생적 길치인 나는 동기보다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느라 괜히 분주하다. 개운치 않은 눈꺼풀을 부여잡아 본다. 이 와중에 배는 고프고. 역시 집 나오면 고생이다. 



우리는 서둘러 탑승 수속을 마치고, 홀린 듯이 식당으로 향했다. “김치찌개 같은 것이 먹고 싶은데. 어때?” 동기가 말했다. 나의 소울푸드, 김치찌개! 앞으로 10일 동안은 만나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김치찌개를 찾지 못한 우리는 아쉬운 대로 육개장과 돈가스를 나눠 먹기로 한다. 사진도 없는 걸 보니, 허겁지겁 먹어치운 모양이다. 마지막 한식이라는 비장한 마음으로.



장거리 비행에 장비는 필수다. 충전기와 휴대폰 거치대.



그렇게 우리는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인천에서 파리 샤를드골 공항까지는 약 14시간의 비행을 버텨야 한다. 5년 전의 코타키나발루까지 5시간 남짓이었으니, 무려 3배 정도인 셈이다. 14시간의 무게 때문일까, 나의 무게 때문일까. 오늘따라 이코노미석이 더 비좁게 느껴진다. 장거리 비행에 대한 걱정도 잠시. 나의 고민을 단번에 잠재워줄 첫 번째 기내식 '쌈밥'이 나왔다.



아시아나항공의 기내식 대표 메뉴, 영양쌈밥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장거리 비행 시, 식사 2번에 간식 1번의 기내 서비스가 제공된다. 기내식 대표 메뉴인 영양쌈밥은 쌈 채소, 불고기, 우거지된장국, 김치와 쌈장 그리고 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제 기내식 협회(ITCA) 수상 이력도 있다고. 유명세 때문인지, 주변의 승객들 역시 대부분 쌈밥을 선택하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김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아직 김치와 헤어지긴 일렀던 것이다.



찻잔은 김치 그릇이 되었다. 놀랍게도 둘 다.



그런데 기내식이 너무 오랜만이었던 탓일까. 우리는 그만 김치를 찻잔에 담고 말았다. 이런 것까지 잘 맞을 것이 뭐람. 우리의 인생 첫 유럽 여행, 이렇게 시작해도 괜찮을까?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리가 여행을 가기로 한 5월, 바로 그때부터. 때마침 승무원이 묻는다. “홍차, 하시겠습니까?”



우린 둘 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제공된 덮밥과 피자. 이번에는 홍차를 마셨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