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l "내 기억이 향이 된다면 어떤 노트를 넣을 건가요?"
"내 기억이 향이 된다면 어떤 노트를 넣을 건가요?"
춥지만 볕이 좋은 날, 혜화 마로니에 공원 앞에 있는 아르코 미술관으로 향했어요. 마로니에 공원 한편에 있는 피아노가 연주되는 날이었죠.
작가는 한반도 전역에 얽힌 향기 메모리를 수집했습니다.
천변
우리 동네에는 맨살을 드러낸 땅이 하나 있습니다. 성북 천변입니다. 비가 올 때 성북 천변 위를 걸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탁한 연감색 물살이 세차게 지나가는 것도 좋고, 잔뜩 젖은 흙에서 나는 냄새도 좋습니다. 흙에서 나는 냄새는 그 주변의 식물들과 온갖 유기물들이 만들어 내는 냄새일까요?
제가 서울에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자리 잡은 동네엔 홍제천이 흐릅니다. 그 옆은 불광천이 있고요. 어느 작가의 불광천을 산책한 기록이 담긴 '천변 산책'이란 책이 떠오르는 향이 기억이네요.
합정역을 지날 때 델리만주 냄새를 참지 못하고 한 봉지를 사고 맙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한두 개 정도 빼먹는 건 당연하고요.
쓰다 보니 신도림역의 향기도 기억나네요. 계단 옆에서 도라지를 까는 할머니의 향긋한 도라지 향기는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도 또렿이 맡을 수 있죠.
푸른곰팡이와 '몽키 47 슈바르츠발트'의 상관관계
제주도에 계신 할머니 댁에서 맡던 귤에 핀 푸른 곰팡내는
성인이 되고 마신 진 '몽키 47 슈바르츠발트'와 조우한다.
어느 외국인의 솔직한 후기
투박한 조명, 취객들, 종종 일어나는 싸움, 1호선은 무엇인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기억하는 한국의 향
겨울철 이른 아침, 얼음 분자가 식물 분자를 흡수하며 내는 눈 냄새가 기억납니다. 아른 아침 눈밭에서 울리는 절 종소리에 대한 기억도 강렬합니다. - 한국 양산 통도사
정말 우리가 아는 그 세계적 큐레이터일까 하고 찾아봤더니 1968년생. 그가 맞다.
찾아봤더니 한국에 꽤나 자주 왔다. 언제 왔을 때의 기억일까 궁금해진다.
북에 놓고 온 기억과 향.
작가는 한반도의 향을 모두 수집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인 기억들.
주로 어린 나이에 북한에 살다가 남한으로 넘어왔거나 탈북한 사람, 북에서 일한 외국인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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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부두에서 명사십리까지의 금모래길.
그 위에 피어난 햇빛보다 더 아름다운 빨간 해당화.
바닷물 냄새, 모래 냄새, 해당화 냄새 그리고 꽃을 꺾어 준 오빠는 군대에 가고 6.25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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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는 불과 물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 얘기했다면, 북한에서는 배추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았습니다. (짠해지는 북한 상황.....
한반도가 처한 현실이나 미래에 남북이 의미 있게
공존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 향기들은 소리도 함께 낸다.
"향기를 맡으면 추억이 되살아나고 그때가 그립고 깨달음도 있는 듯하다. 보는 것, 맡는 것, 듣는 것으로 하여 인간의 삶을 느끼고 소소한 행복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마도 향기는 단지 냄새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향기도 담아내지 않을까 싶다."
1984 북한 회령 출생, 인천 거주
"냄새라는 것이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속성이 있다."
"또한 온전히 제어할 수 없는 향을 속성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누구에 관한, 그곳이 어디였는지, 또한 어떤 장소였는지와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도록도 향을 입었다. 제작은 러시 코리아와, 표지 향은 논픽션과 함께.
킁킁. 킁킁이가 된 듯 킁킁거리며 떠있는 뫼비우스 띠 모양 나뭇조각 사이를 돌아다녔어요.
'뭐지 킁킁킁'
돌아다닐수록 미묘하게 다른 향이 나더라고요.
알고 보니 17개의 뫼비우스 띠 조각은 17개의 향기 디퓨저로 작동하고, 17개의 향은 각기 다른 조향사가 하나씩 만들었는데, 이야기에서 고른 키워드와 영감을 받은 문구, 주요 노트를 기록한 부분이 재밌어 몇 장 찍어왔어요.
나를 웃게 한 노트는
- 호박잎 어코드
- 햇빛 어코드
- 수제 식혜 냄새
- 갓 지은 밥 어코드
- 참깨 앱솔루트
- 간장 어코드
벽에 칠한 색마저 작품.
전시 연계 프로그램
<향기 속에 담긴 이야기ㅋ>
2층 아카이브 라운지
아카이브 라운지에서는 <향기 속에 담긴 이야기> 활동을 할 수 있어요. 글을 쓰고, 파일 안에 끼워놓으면 나의 사연을 다른 사람도 보게 되는 거죠.
한국의 도시에 얽힌 나의 기억은 도서관 내리막을 내려오기 전에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던 날의 노을 지던 하늘을 바라보며 맡았던 계절이 바뀌는 향기, 그 안에 있던 밥 냄새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저희 동네는 한강하구 쪽에 있었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꼈는데요. 자습을 마치고 집에 가던 코끝에 걸린 안개 향기와 차가 쌩쌩 달리던 어스름한 풍경이 생각나네요.
아르코 미술관은 휑이추푸 전시 이후로 오랜만에 방문했는데요. 보고 싶은 전시가 많았지만 (특히 ai를 활용한 미디어아트 단체전을 놓쳐서 아쉽다.) 왜인지 오랜만의 방문했어요. 이전 전시에선 전시공간이 꽤나 커 보였는데, 가벽을 치우고 벽을 그대로 드러내어 향으로 만 채우니, 크기가 그대로 보여 꽤나 작아 보이더라고요. 시각적 요소를 제한하니 후각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거 같기도 합니다.
1층 향기 메모리에서 재밌는 공통점을 발견했어요. 질문에 답한 사람이 대부분 예술 관계 인구였다는 사실.
외국인은 광주비엔날레와 관련된 사람과 한예종 같은 예술과 교환학생의 김치, 떡볶이와 관련된 사연이 많았어요. 냉장고에 김치 없이 사는 한국인도 많은데 여전히 김치랑 떡볶이는 외국인에게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음식인가 봅니다. 그리고 부산 등 바닷가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바다의 짠내,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위로가 된 향을 담은 기억이 많더라고요.
1층 전시장에 있는 건 천에 인쇄된 글뿐이었지만 꽤나 오랜 시간 머물렀어요. "향은 맡고 싶지 않다고 안 맡을 수 없고, 향이 불러일으키는 기억 또한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