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라 돌려라 돌려라.
다음 물레수업까지 또다시 일주일.
겨우겨우 손 끝에 닿은 감각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 좋은 기간.
시간만 된다면, 금전적 여유만 된다면, 정말 주 2, 3회씩은 수업을 받고 싶었다.
나는 한 번 빠지면 꽤나 앞뒤 없이 몰두하는 편이라 다음 물레수업이 더욱 길고도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수업 전까진 직접 물레를 돌릴 수 없으니 툭하면 물레영상을 보았다.
'영상을 많이 보는 것도 도움이 돼요.'
라는 선생님의 말도 있었고 이미 나는 알고리즘의 덫에 걸렸고 물레영상을 보다 보면 홀리듯 집중되는 매력도 있었기 때문에 정말 심심하면 봤던 것 같다.
'나도 저렇게 자유자재로 만들고 싶다.'
'어떻게 저렇게 부드럽게 움직이시지.'
'이렇게 하면 저렇게 모양이 나오는구나.'
도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초초초심자인 나는 그저 영상 속 자세, 손동작, 움직임 등만 열심히 쫓아 눈에 익혔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물레영상으로 달래 가며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물레수업날이 왔다.
오늘은 어떻게든 제대로 된 원형컵을 만들어봐야지.
원형컵을 만들면 그다음단계인 굽깎기를 배울 수 있는데 저번 수업에서는 쓸만한 원형컵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하게 굽깎기도 할 수가 없었다.
과연 오늘은 실패 없이 만들 수 있을까, 설렘 반 긴장 반으로 공방문을 열었다.
선생님과 인사를 한 후 물레를 돌리기 위해 자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평소 내가 쓰던 자리에 다른 정기수강생분이 앉아계셨다.
물레는 총 3자리가 있었는데 나는 처음 수업 때 가운데 자리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 이후도 쭉 가운데에 있는 물레를 사용했다. 보통 그 옆, 제일 오른쪽 물레를 다른 정기수강생분이 사용하셨었는데, 알고 보니 그 자리의 물레가 오늘 고장이 나서 가운데 자리에 앉으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가장 왼쪽에 있는 물레를 사용하게 되었다.
왼쪽에 있는 물레는 가운데에 있던 물레랑 조금 다른 모델이었다. 스위치부터가 달랐는데 설명문구도 없어서 이리저리 만져보는데 물레판이 시계방향으로 회전해야 하는데 자꾸 시계반대방향으로 회전을 해서 설정을 바꾸는데 조금 헤맸다.
발판도 가운데 물레보다 조금 뻑뻑해서 힘을 주어 밟아야 물레속도가 변했었다. 너무 힘을 주어 밟다가 속도변화의 폭이 확 커질까 두려웠는데, 하기 전에 몇 번 밟아보며 감을 익혀보니 약간의 템포를 주며 조절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발판이 뻑뻑하니 밟는 힘에 민감하지 않아서 오히려 속도가 쉽게 바뀌지 않고 나름 동일하게 유지되는 점은 좋았다.
사실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지만, 장인이 아닌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원형컵을 만들어보리라 했는데 익숙하지 않은 물레다 보니 평소보다 더 실력이 안 나올까 싶었다. (그렇다고 나올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한 번에 많은 양의 소지를 사용하기엔 아직 많이 비루한 실력이기 때문에 작은양으로 잘라서 준비했다. 옆에 수강생분은 2~3년 넘게 하셨다고 한 것 같았는데 역시나 한 번에 많은 양의 소지로 쭉쭉 작품들을 뽑아내셨다.
'멋있다.'
어떤 느낌일까? 나도 저 재미를 알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의 늪에 잠시 빠졌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눈앞에 있는 소지에 집중했다.
오늘 나에게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원형컵을 만들어내는 것. 오늘은 그것뿐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심호흡 한 번.
나름 경건하게 몸과 자세를 다잡은 뒤 나에게 아주 큰 산이자 역경인 중심 잡기를 먼저 시작했다. 조금은 알 것 같기도 그러다 갑자기 모르겠기도, 여전히 알쏭달쏭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알려주신 삼각형 팁이 아주아주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선생님처럼 능숙하게 자유자재로 중심을 잡진 못했지만 몸살을 안겨주었던 첫날의 중심 잡기를 하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아주 장족의 발전이었다.
왜냐하면 전에는 중심 잡는데만 꽤 시간이 걸렸는데 오늘은 생각보다 꽤 빠르게 중심이 잡혔기 때문이다.
중심 잡기 연습을 더해야 할까 내적고민을 조금 했는데, 물론 중심 잡기 연습도 중요하지만 오늘은 원형컵을 꼭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냥 바로 원형컵을 만들어보았다.
엄지를 세워 구멍을 만들고 원하는 만큼 넓혀 크기를 잡아주었다. 두 손가락을 이용해 바닥도 나름 평평하게 잡아주었다. 그리고 이제 중요한 관문.
'옆이 아닌 위로 쭉 끌어올린 다는 느낌으로 하시면 돼요.'
라는 선생님의 말을 되새기며, 여태 보았던 영상 속 손동작들을 떠올리며,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팔꿈치를 잘 고정시켜 주며 조심스럽게 컵의 벽면을 세워주었다.
... 오늘 무슨 일이지...?
생각보다 부드럽고 안정적이게 잘 올라가는 벽면에 사실 깜짝 놀랐다.
오늘따라 손가락감각이 꽤나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흙의 감각이 선명하게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기뻐하기엔 아직 이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마치 흙의 호흡. 그래, 전집중호흡이 필요할 때였다.
벽의 두께는 너무 얇지 않게, 처음부터 꽉 잡아서 얇게 끌어올리는 것보단 몇 번에 나눠서 해주는 것이 좋다. 섬세하고 부드럽게. 원하는 두께와 길이만큼 끌어올려준다. 너무 얇으면 건조하면서 힘을 잃고 무너질 수 있어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게 두께감이 있는 것이 좋다.
어느 정도 컵의 형태가 갖춰졌다면 이제 마무리 작업으로 입부분을 고무전대로 부드럽게 다듬어준다. 지금 상태에서는 그렇게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별도의 마무리 없이 기물을 말리고 소성하게 되면 생각보다 날카롭게 변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꼭 고무전대를 사용해서 입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모든 작업이 끝났으면 이제 밑가새를 이용해 소지에서 성형된 기물을 떼어내면 된다.
첫 연습부터 원형컵을 2개나 뽑아냈다. 심지어 꽤나 그럴싸하게 모양이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도대체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심지어 이 모든 게 30분 내에 일어났다.
음,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어안이 벙벙, 어리둥절, 물레둥절했다.
보통 정신 차리고 시계 보면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는데 30분 정도밖에 안 지났다니. 게다가 몸상태도 아주 가벼웠다.
오늘이다.
지금 나에게 물레의 신이 잠시 강림한 것이 틀림없다. 이럴 때 아낌없이 쭉쭉 뽑아내야만 했다.
10분 정도 쉰 다음 곧바로 다음 소지를 올려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역시나 중심 잡기에서 조금 헤매긴 했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 중간중간 잡아주시기도 했고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금방 다시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탄력 받은 나는 열심히 원형컵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때는 내가 좀 들뜨기도 했고 집중력이 떨어지기도 해서 첫 번째 했을 때만큼 마음에 드는 원형컵이 만들어지진 않았다.
심지어 하나는 중심 잡기에서부터 제대로 안 잡혔는데 만들어버려서 중간에 아주 대차게 벽이 흐물흐물 뭉개져버렸다. 그때의 심정이란, 정말 그 짧지만 깊었던 그와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갈 정도로 가슴 아픈 이별이었다.
대차게 망한 아이는 바로 반죽행 통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나마 아직까지 살아남은 아이들의 모습.
사실 저기 가장 작은 아이도 반죽행이어야 했는데 앙증맞은 것이 귀엽기도 해서 우선 남겨두었다.
컵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다니. 사실 완성도가 높은 건 아니었고 이 중 반죽행이 될 아이들도 몇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기뻤다. 이렇게 여러 종류로 만들어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아주 큰 기쁨이자 즐거움이었다.
벌써 두타임이나 뛰었는데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 계속해서 물레를 돌리고 싶었다. 쭉쭉 뽑아내고 싶었다. 드디어 나의 눈앞에 다음단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미친 듯이 물레를 돌리기 시작했다. 내 물레공장의 첫 가동이었다.
(bgm)
I'm on the Next Level Yeah
저 공방의 문을 열어
Next level
널 결국엔 내가 돌려
Next level
원형컵 만들 때까지
Next level
둘려라. 돌려라. 돌려라.
그렇게 나는 열심히, 전집중으로 물레를 돌리고 돌리고 돌렸고, 그 결과 원형컵을 총 9개나 뽑아낼 수 있었다.
내가 뽑아낸 것들을 보고 선생님은 아주 놀라셨다.
'엄청 잘하셨는데요? 물 조절도 알맞게 잘하시는 것 같고 바닥도 꽤 평평하게 잘 피셨어요! 하실 때마다 금방금방 실력이 느시네요. 정말 손재주가 너무 좋으신 것 같아요.'
선생님은 오늘도 어김없이 무한 칭찬을 해주시며 하나씩 상태를 봐주셨다. 바닥이 평평하게 안 잡혔거나 벽이 너무 얇게 뽑힌 것들을 제외하고 총 5개가 최종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지금 당장은 보관하기 어려워서 어느 정도 마르면 선생님이 스티로폼 박스 안에 넣어주시기로 하셨다.
그리고 한 달 전 체험해 보았던 원데이클래스에서 만든 컵이 드디어 완성되어 이 날 받을 수 있었다.
물론 100% 나 혼자 만든 컵은 아니고, 거의 공방에서 만들어준 컵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마음에 쏙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붓느낌이 더 강하게 나와서 좋았다. 내가 딱 원했던 느낌. 언젠간 온전히 나만의 손길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아무튼, 오늘 수업에서 생각이상의 성과를 얻은 나는 드디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굽깎기.
이것 또한 분명 쉽지 않은 작업이겠지.
아마 저 5개의 컵이 깡그리 뭉개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계속해서 물레를 돌릴 것이다.
돌리고, 돌리고, 돌려서 나는 갈 것이다. Next Level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