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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화 Mar 18. 2024

정신과 시간의 굽.

굽 깎는 소녀.

굽. 그리고 다시 굽.



내 머릿속은 온통 굽으로 가득 차있었다.


밥을 먹을 때, 물을 마실 때, 접시에 있는, 컵에 있는 굽이랑 굽은 다 관찰했던 것 같다.



굽깎기 영상도 얼마나 찾아봤는지.


유산소운동을 하면서, 자기 전 이불 속에 들어갔을 때도 심심하면 굽 깎는 영상을 틀었다. 아쉽게도 설명영상보단 ASMR영상이 많았는데 보다 보면 이해가 가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굽 깎는 소리는 참 듣기 좋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깎이는 모양을 보는 것도 은근 중독성이 있었고 묘하게 빠져들게 되었다.


'아, 나도 빨리 굽 깎아보고 싶다.'

얼마나 속으로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드디어 도예수업날이 왔다.



수업 전날 청첩장 모임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에 쌓여있던 말들을 길게 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늦게까지 술을 마시게 되어 처음으로 수업시간에 10분이나 늦었다. 급하게 공방문을 열고 들어가 후다닥 환복을 하고 스티로폼박스에 보관되어 있던 나의 기물들을 꺼냈다. 시작부터 정신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우려하긴 했는데, 2주 전에 만들었던 것들이 아직도 살짝 덜 말라있었다. 기물은 말리는 것도 중요한데 너무 빠르게 말리게 되면 마치 메마른 논과 같이 쫙쫙 갈라지면서 금이 갈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하게 천천히 잘 말려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냥 외부에 덩그러니 두는 것보단 비닐 같은 걸로 덮어서 수분이 천천히 날아가게 말려주는 것이 좋다. 나는 비닐+스티로폼 박스에 보관을 했다 보니 마르는 속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더뎠던 것 같다. 그래도 굽을 깎을 수 있을 정도여서 오늘은 제대로 굽깎기를 배워보기로 했다.



마침 선생님이 원데이클래스에서 다른 수강생들이 만든 기물들의 굽 깎는 작업을 하고 계셨어서 그걸로 굽 깎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보여주셨다.



물레성형할 때 필요한 도구들이 많았던 것에 비해 굽깎기는 작은 물통과 스펀지 그리고 굽칼이 있으면 된다.


스펀지에 물을 묻혀 물레 회전판 위에 얇게 펴 발라준다. 기물 입부분에도 살짝 물을 묻혀주면 회전판과 더 흡착력이 좋아진다. 다만 기물의 입부분까지 색을 칠한 경우라면 기물에는 물을 안 묻혀주는 것이 좋다.



아, 그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기물의 안이다. 기물의 안쪽 공간이 어떤 모양으로 잡혀있는지를 잘 기억해서 그 모양을 반영해 겉면의 굽을 깎고 다듬어줘야 한다. 각져있는지, 둥글게 잡혀있는지를 꼭 확인한 다음에 기물을 회전판에 부착시켜줘야 한다. 한 번 부착하면 도중에 다시 떼서 기물 안을 확인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때도 기물의 중심을 잘 잡아주어야 한다.


이 중심 잡기는 설명이 조금 어려운데 온전히 손가락 감각에 맡겨야 한다. 영상들을 보았을 때나 선생님이 알려주었을 때나 중심 잡는 방법은 꽤나 다양하게 있는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에게 맞는, 더 중심을 찾기 쉬운 방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우선 선생님이 알려주신 방법으로 기물의 중심을 잡았다. 양손 엄지와 검지를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어주는데 검지는 붙일 필요가 없고 엄지는 왼쪽 엄지는 기물에 닿게 오른쪽 엄지는 왼쪽엄지를 지탱해 주듯 뒤쪽에 겹쳐주면 된다. (손가락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나는 왼손 엄지로 기물을 느끼는 게 자세가 더 편했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 

그렇게 기물을 둘러싼 후 살살 돌려가며 중심을 맞추는 방법이었는데 여기서도 양손이 흔들리지 않게 팔꿈치를 몸에 잘 고정시켜야 한다. 통통 튀기는 느낌이 들면 중심이 잘 안 맞춰져 있는 건데 더 통통 튀는 쪽을 밀어가며 중심을 맞춰가면 된다.


처음에는 조금 헷갈려서 계속 움직여보았는데 그래도 뭔가 계속 통통 튀는 느낌이 들어서 난감했다.

그때 선생님이 팁을 하나 주셨는데, 중심이 잘 맞춰졌는지 모르겠을 때는 살짝 돌려가며 측면을 굽칼로 얕게 깎아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균일하게 잘 깎이면 중심이 잘 맞춰진 거고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밀어가며 중심을 맞추면 된다고 했다. 


어찌어찌 중심이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말랑한 흙반죽 3, 4개를 준비해서 회전판에 부착해 기물을 고정시켜 준다. 기물에 붙인다는 느낌이 아닌 회전판에 흙반죽을 눌러 붙여 기물이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켜 준다는 느낌이면 된다. 너무 기물에 맞닿게 붙이면 기물의 모양이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유의해서 고정시켜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났다면 드디어 굽을 깎을 시간이다.

대차게 망해버린 첫 번째 도전.

우선 대차게 망해버린, 함께 다음 스탭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 나의 불쌍한 기물을 공개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우선 초반부터 물레의 회전속도와 흙의 힘에 밀려버려 흔들흔들 그렇게 숭덩숭덩 깎아버리기도 했고, 긴장된 마음에 정신없이 하다 보니 기물 안 쪽이 어떤 모양인지 제대로 파악을 안 하고 회전판에 부착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살짝 변명을 덧붙이자면 이전 단계에서 밑가새를 이용해 기물을 떼어낼 때도 너무 바닥면에 바싹 떼어내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무자비하게 깎아버린 것이 크지만. 

그렇게 결국 측면을 다듬다가 그대로 바닥면을 도려내버리게 된 것이다. 잘려진 모양을 보니 이 기물은 안 쪽이 각졌던 것 같다. 근데 내가 둥글게 다듬어 버려서 이렇게 끝부분이 도려진 것으로 보였다.



사실 그래서 밑가새의 사용방법도 꽤 중요한데, 밑가새를 이용해 기물을 떼어낼 때 모양을 이쁘게 잘 잡을수록 굽을 깎는 시간과 노력이 줄어든다. 아마 중심 잡는 것도 더 편할 것이다. (물레는 정말 중요하지 않은 과정이 단하나도 없다.)


이렇듯 나처럼 멋모르고 떼어낸 경우 우선 삐뚤한 측면을 어느 정도 살짝 다듬어주는 게 좋다. 여기서 측면이라 함은 컵의 기둥면이 아닌 바닥의 테두리면을 다듬어 주는 것이다.

그 후 바닥면을 평평하게 깎아주면 된다. 가운데에서 옆으로, 얇고 균일한 속도로 움직이며 깎아주면 된다. 이때 물레의 회전속도와 흙의 힘에 밀리지 않도록 팔꿈치를 몸에 잘 고정시키고 왼손으로 굽칼을 쥔 오른손을 잘 지탱해주어야 한다. 왼손 약지나 새끼손가락, 오른손 약지나 새끼손가락으로 기물이나 회전판 어딘가를 고정하듯 지지하는 것도 좋다. 



어차피 굽을 또 깎아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완벽한 수평을 맞출 필요는 없고 어느 정도 평평하게 깎였다면 이제 본인이 원하는 굽의 위치나 크기 정도를 정해 그 모양대로 굽을 깎으면 된다. 


우선 굽의 안쪽 크기를 정해 원형을 만들어 준 후 그 안 쪽을 파 들어가면 된다. 이때도 가운데에서 옆쪽으로, 한 번에 많이 파지 않고 얇게 여러 번 깎아주는 것이 좋다. 중간중간 바닥의 두께가 어느 정도 남았는지 확인해 가면서 깎아가면 되는데, 보통 소리로 파악을 한다. 손가락으로 바닥면을 통통 두드려봤을 때 소리가 둔탁하게 난다면 아직 두껍다는 뜻이다. 소리가 점점 가벼워진다면 바닥두께가 얇아졌다는 뜻이다. 헷갈릴 때는 기물의 옆면을 쳐보는 것도 좋다. 어느 정도 소리가 비슷해질 때까지 깎아내면 된다. 이것도 감각이기 때문에 자주 해보며 익히는 방법밖에는 없다.



적당히 굽 안 쪽을 깎았다면 그다음은 바깥쪽을 깎을 시간이다.

원하는 두께의 굽을 만들기 위해 물레를 돌리며 바깥라인에 원형을 표시해 준다. 그리고 남은 부분을 깎아가면 된다. 이것도 안에서 바깥쪽으로. 원하는 컵의 모양에 맡게 조심스럽게 살살 다듬어가며 깎아내려가면 된다. 이때 굽 바깥쪽보다 안쪽의 높이가 높아야 한다. 바깥쪽을 더 많이 깎아야 한다는 걸 감안하면서 굽 안 쪽을 깎는 것이 좋다.

두 번째 굽깎기를 하던 중간.

이번 기물은 꽤나 넉넉하게 떼어냈는지 깎아낼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생각보다 거침없이 파내려 갈 수 있었다. 시원시원하게 깎아가는 내 모습을 보시곤 선생님의 칭찬이 다시 시작되었다.


'잘하셨네요! 원래 초반에 굽깎기 할 때 많이들 겁내는데 거침없이 하시네요.'


아니에요, 선생님. 이전에 하나 야무지게 말아버렸는걸요.라고 차마 크게 뱉지 못하고 작게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그저 운이 좋았던 거였어요.


그리고 처음에는 굽 두께를 굵게 잡는 게 좋은데 다듬다 보면 점점 굽이 얇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못해서도 있다.) 어느 정도 굽의 모양을 만들고 안과 밖을 다듬었다면 굽도 평평하게 펴주는 작업이 필요한데, 안면과 바깥면을 지붕모양처럼 다듬듯 깎아 만들어준 후 그 가운데를 깎아주면 평평하게 이쁜 굽 모양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너무 날카로운 부분은 살살 깎아 다듬어주면 된다.


굽깎기는 정말 설명이 어려운 게 감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정해진 것 없이 오직 본인의 취향, 감각을 여기에 담아내고 깎아내면 되는 작업이다.

 


물론 초심자인 나는 그럴 단계에 이르려면 아직도 한참이기 때문에 그저 연습하며 감각을 익힌 다는 마음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굽깎기.

원하는 만큼 굽을 깎고 다듬었다면 손가락으로 살살 마무리지어주는 게 좋다. 아무래도 굽칼로 깎아서 울퉁불퉁 날 서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매만져서 둥글게 마무리 지어주는 게 좋다. 이때 손가락에 너무 힘을 주면 애써 힘들게 깎은 굽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정말 깃털을 만지듯 부드럽고 가볍게 다듬어주는 것이 좋다.



이 모든 작업이 끝났다면 회전판에 부착한 흙반죽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모양이 망가지지 않게 기물을 회전판에서 떼어내면 된다. 살짝 퉁하고 기물을 쳐서 흡착력이 느슨해지게 한 후 조심히 들어 떼어내는 게 좋다.


그러고 나서 물기를 살짝 머금은 스펀지로 다시금 다듬어주는 작업을 하면 된다. 조심스럽게 살살. 표면에 묻은 자국이나, 지문 등을 문질러 매끈하게 다듬어준다. 겉면을 어느 정도 다듬었다면 입부분과 안 쪽도 조심스럽게 스펀지로 매만져 다듬어주면 된다.

굽깎기 완성. (왼쪽은 선생님이 설명하면 깎은 기물, 중간과 오른쪽은 내가 깎은 기물들)


굽깎기와 스펀지로 다듬는 작업이 끝난 기물들이다.


진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해서 굽깎기를 하고 기물들을 매만지는 작업을 했는데, 전혀 피곤하지가 않았다. 지금까지의 수업 중 제일 집중도가 높았던 작업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재미있어. 이게 뭐야? 도대체 물레, 너의 매력은 어디까지인 거니.



마치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간 느낌. 근데 이제 반대였다. 굽을 깎는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흐르지 않은, 몇 분 된 것 같지도 않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흘렀는데 바깥세상의 시간은 벌써 3시간이 흘러있는 그런 느낌.

물론 그렇다고 쉬운 것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든지 들어가고 싶은 방이자 감각이었다.

그래, 마음만으로는 그냥 하루종일 굽을 깎고 싶었다. 호두 까기 인형 아니, 굽깎기 소녀가 되고 싶었다.



굽을 깎으며 선생님과 스몰토크를 했는데, 선생님이 물레 다음으로 해야겠다고 정한 취미가 있는지 물어보셨다.


'저는 회사 다닐 때 이렇게 취미를 즐겨야겠다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도 없었는데 참 대단하신 거 같아요. 저는 그때 왜 그렇게 화가 많았는지.'


'저도 그래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었어요. 근데 계속 쌓이니까, 이 화를 표출 안 하면 제가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저것 해보고 작년에는 목공도 배웠는데 그건 또 몸이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러다 이번에 도예를 배워보기로 한 건데 지금 너무 좋아요. 힘든데 즐겁고 재미있어요. 물레를 돌리면 제 안에 화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물레 다음으로 해야겠다고 정한 게 없어요.라고 덧붙여 말했다.


'해보니까 물레를 제대로 하려면 최소 1년은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처음에는 중심 잡기란 산을 넘었는데 그다음에 기물성형하는 산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힘들게 넘었는데 이번에는 굽깎기라는 큰 산이 또 나타났어요. 산 넘어 산 넘어 산 같은 느낌인데 그게 참 힘든데 재미있어요.'



'맞아요. 근데 그렇게 해서, 그 모든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내가 만든 기물들을 굽고 완성하게 되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되실 거예요. 처음 제가 만든 작품을 가마에서 꺼냈을 때 정말 기뻤고 감동했거든요. 저는 수강생분이 빨리 그 감정을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오늘 만든 기물들을 보니 벌써부터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작업과 시간, 과정, 그렇게 나의 모든 것, 품을 들여 소중히 만들어진 것들이 모든 자태를 갖춰 나오게 된다면. 벌써부터 어떠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몽글몽글한 감정이 들었다.

  


마음이 설레었다. 다음 수업날이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남아있는 기물들의 굽을 열심히 깎고 싶었다.


그렇게 다음으로. 그다음의 다음으로.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무수한 산들이 있겠지만, 그게 아무리 힘들고 거칠어도 어떻게든 넘어서고 싶었다.

그렇게 내 눈앞에 펼쳐질 황홀하고 아름다울 풍경을 기대하며.


나는 정신과 시간의 굽을 깎을 것이다.

여전히 내 물레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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