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다 보면 난감한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상황은 누구에게나 해당할 것이고, 각자에 따라 모습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인사를 받는 것을 굉장히 난감해한다. 특히나 친절한 미소와 함께 어우러진 인사에 더욱 나약해진다. 그것이 어찌 난감한 일인 것인지 명확한 이유를 듣지는 못했으나, 예상치 못한 -지극히 보편적일 수도 있는-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난감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은 나도 자유롭지 못한 것인데, ‘나’를 소개할 때가 오면, 난감하다 못해 어찌해야 할지를 모를 지경이다. 종종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숨이 탁 막혀,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코와 목의 중간 지점에서 씁쓸한 피 맛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아주 담대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소개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수줍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 · ·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 · · 자신이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이 싫어한다는 것을 꽤나 선명하게 설명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그렇게 결정지을 수 있는 근원에 대해 궁금할 따름이다. 혹은 어떻게 자신을 -잘- 인식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물론 그 사람들에 대한 나의 신뢰도는 높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설명하는 내용은 어쩌면 이상理想하고 있는 방향일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허상虛像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허름하고 칠이 다 벗겨진 -어떻게 바람에 날아가지도 않고 있는지 의문인- 가벼운 덮개를 슬며시 열어 본다. 그곳엔 예상과 가까운 허무와 공백뿐이다. 어떠한 공간을 보며 차가운 공기와 마주할 때 느끼는 허무함이 아니라, 진정한 공백이다.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 어둠도 빛도 공기도 호흡도 노을도 뿌리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그것을 보며 -어쩌면 그것을 마주한 채 눈을 감고는- 무언가를 생각한다. 행복을, 이상을, 함께함을, 따뜻함을. 그러면 어렴풋이 형태 비슷한 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 그것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설명할 수 있긴 할까? ‘나’라는 건 그저 거짓의 이미지이지 않을까?
‘자아’라고 부르는 그것은 어쩌면 모르핀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큰 흐름의 한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의미다. 더 풀어서 설명을 하면, DNA가 여기서 저기로 흐르는 과정 중에 한 장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흐름의 한 방울인 나는 DNA의 빈 껍데기이자, 이동 수단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느낀다. 감각하고 인식한다. 그렇기에 삶이 괴로운 것이리라. 그래, 그건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와 만나 자신을 소개할 때 이런 말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안녕하세요. 저는 DNA의 흐름의 한 장면이자, 한 순간이자, 한 방울이자, 이동 수단인 빈 껍데기입니다.” 라고 말이다.
혹자는 내게 거울을 보고 그 모습을 설명하라고 할 수도 있겠다. (비유적인 의미의 거울이리라) 그렇지만 거울 속에 비친 것이 나 자신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나. 가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라고 당연히 생각되는 누군가에게 낯선 기분을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 그 안에 있는 건 이미지일뿐이지 않은가. 나는 나라고 의심되는 이미지를 보며 나를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이 말이다. 초등학생 때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소개하는 상황이 몇십 년이 지났지만, 핵심은 그대로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주먹만 한 돌을 그 누구도 -혹은 자신도- 건드리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에겐 자신을 소개하는 건 누워서 침 삼키는 정도의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곤혹스럽고 난감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