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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요한 Mar 05. 2024

여름보다 뜨거웠던 훈련

3학년 사관후보생

 교내 집체교육과 기초군사훈련이라는 관문을 넘고 나는 '사관후보생'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상급자가 부르면 즉각적으로 '사관후보생 한요한!'을 씩씩하게 복창했고, 내가 장교 후보생이라는 것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토록 동경했고 입어보고 싶었던 단복을 처음 입었던 순간은 정말 행복했다. 무엇이든 용기와 패기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노력만 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것 같았다.



 학군단 생활 중 첫 학기인 3학년 1학기에는, 인사과장 후보생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어 다른 동기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열심히 학군단 생활을 하였다. 난 휴학을 하여 1년 선배들과는 거의 동갑이었지만, 나이에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싹싹하게 행동했고 선배들은 이를 알았는지 다른 동기들에 비해 나를 거의 혼내지 않았다.

 당시 태양의 후예 덕으로 나는 동기 후보생들과 생전 안 해본 과팅도 몇번 나가 보았고(이후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한다), 종종 찾아오는 선배님들의 집합 시간에는 느슨해진 긴장감을 다시금 찾기도 했고, 동기들과 놀러다니며 재미있고 활기찬 대학생활을 했다. 또 여름방학에 있을 훈련을 위해 열심히 운동하며 기초체력을 다졌다.


3학년 하계입영훈련

 나의 20대 중 가장 뜨거웠던 시기다. 태양이 푹푹 찌던 7월, 나는 충북 육군학생군사학교에서 청춘을 불살랐다. 날씨가 너무 더웠던 관계로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오전 3시 기상, 오후 7시 취침. 사실상 다음날 교육 받을 것들을 미리 공부하다보면 평균 오후 9시에 취침했다.(공부를 하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로 다들 열심이었다)


 오전 3시에 기상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전투복을 입는다. 언제부터 사용 되었는지 모를 더러운 탄띠를 허리에 두르고, 쓰기에 찝찝한 수통에 물을 받는다. 쓰지도 않을 방독면 가방을 허리, 허벅지에 칭칭 감아 멘다. 발꿈치를 들어 관물함 위에 있는 무거운 군장을 내리고 집어 멘다. 쓰고만 있어도 답답한 방탄모를 눌러쓰고 총기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간다. 이 새벽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힘들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듯 했다.

 대대 전체가 집합하여 아침점호와 훈련 준비상태 점검을 한다. 졸리고 힘들지만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나 하나로 대대 전체의 훈련에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훈련 교장으로 올라가는 길이면 항상 군악대가 우리를 위해 군가를 연주 해주었다. '나도 군악대 시험에 붙었다면 저들처럼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 나는 전투를 지휘하는 장교가 되고 싶었고 그들이 연주하는 군가의 가사를 곱씹으며 한 발 한 발 당차게 내딛었다. 가슴에 불을 지피고 눈을 부릅떠 정면을 응시하며 전진했다.

 군악대의 연주를 들으며 올라간 나의 사기는 늘 1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당장 졸음이 쏟아지고, 몸에 걸쳐멘 장구류들이 너무 불편했고, 어깨를 짓누르는 군장의 무게는 버거웠고, 오르막길은 왜 이렇게 많은지 숨도 차고 허벅지도 터질 것 같았다. 오전 4시도 되지 않은 깜깜한 새벽에 우리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이동했다. 다 내려놓고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다들 어떻게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잘 견디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혼자 포기를 생각하는 내가 나약해 보였고 사실 나는 장교에 걸맞지는 않은 사람일까 까지 생각이 들었다.

 겨우 겨우 교장에 도착해 군장을 내려놓았고, 잠시 쉬는 시간이 왔다. 옆에 있던 동기가 하는 첫마디는 '나 진짜 포기하고 싶었잖아. 그냥 그만 둔다하고 일반 병으로 갈까 생각했다니깐'

 나 혼자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모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견디고 있었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훈련 내용은 사실상 그렇게 대단한 전술이나 군사지식은 아니었다. 오직 더위 가운데 육체적 고통을 이겨냈던 순간만 기억에 남는다. 앞에서 교관님이 설명하고 계시면 서서 졸 정도로 피곤했다.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했으나 아직 생활체력과 정신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훈련 기간에 동기와 나눴던 대화 중 기억에 남는 것은, ‘포도주스에 얼음 딱 넣어서 마시고 싶지 않아?’라고 했을 때 동기가 ‘와 미쳤다..’라며 깊은 영혼으로 공감하던 순간이다. 그만큼 물을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있었고, 비타민이 부족했다. 훈련 기간에 외부 음식물은 반입 금지였지만 발포 비타민 만큼은 허용이 됐었다. 일과가 끝난 뒤 시원힌 정수기 물에 발포 비타민을 타먹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고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더위와 갈증을 버텼다. 어떤 날은 두개씩 타먹으며, 앞으로 남은 발포비타민의 개수를 세며 초조해 했던 기억이 있다.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면 전투복은 완전히 땀에 젖어 있었다. 그 젖었다는 표현은 물을 쏟았을 때의 젖은 수준이 아니고, 물 속에 첨벙 들어갔다 나왔을 때의 수준이다.

 흠뻑 젖은 전투복과 양말을 벗고, 씻지도 못한채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나간다. 준비 체조를 하고 대형을 갖춰 군가를 부르며 뛰다보면 옆 대대 후보생들도 뛰며 지나가는데, 그 군가 소리가 너무나 커서 장엄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마 내가 뛰었던 대형도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런 느낌이었겠지.


 뛰고나면 또 땀이 흠뻑 젖어 있으나 거기서 끝이 아니다. 교관님의 통제 하에 땡볕인 아스팔트 위에서 팔굽혀펴기와 스쿼트 등 근력운동을 하며 다시 기합을 지른다. 교관님의 통제성 운동이 끝나면, 그때부터 진짜 청춘이 시작 되었다.

 우리 중 운동을 좋아하고 고통을 즐기는(?) 인원이 주도해서 운동을 더 하자고 한다. 처음에는 다들 미쳤냐고 하지만, 하나 둘 분위기에 이끌려 자세를 잡기 시작한다. 어느새 우리는 동그랗게 모여 엎드린 후, 개수를 늘려가며 악을 지르며 팔굽혀펴기를 한다. 내 코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얼굴 앞 아스팔트 바닥은 누가 물이라도 쏟은 듯 땀이 손바닥만하게 흥건해졌다. 당시 우리의 가슴을 태우며 움직이게 했던 말은 ‘하나 더!’, ‘할 수 있어!’였다.


 날씨보다 뜨거웠던 우리의 훈련이 종료된 후엔, 동기들과 다같이 샤워를 했다. 서로의 몸을 평가하며(근육 얘기하는 거ㅎ) 씻고 난 뒤에는 각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어김없이 시원한 정수기 물을 받아 발포비타민을 넣고 비타민이 다 녹을 때까지 고단했던 하루를 되돌아보곤 했다. 하루가 썼던 만큼 비타민은 달콤했다.

 다같이 모여 다음날 교육자료를 시청한 후 토의를 하고 수다도 떨며 나름 화목한 시간을 보낸다. 이후 저녁점호와 불침번 신고를 마치고서야 육군학생군사학교의 불이 꺼졌다. 그러나 절반 이상이 취침하지 않고 다음날 있을 교육을 예습 한다며 빈 강의실로 들어간다.

 강의실에서 다같이 공부를 하다보면 하나 둘 취침하러 사라지고, 어느새 강의실은 썰렁해진다. 그러다 몇 안 남은 다른 학교의 학군단 동기에게 말을 붙이며 친해지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다사다난한 하루가 끝나고 침대에 누우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불침번이 있는 날은 지옥)


 달콤한 잠은 잠시, 다시금 새벽 3시가 되었고 어김없이 기상나팔 소리가 울린다. 


돌아보며

 ROTC에 지원하기 전엔 후보생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고, 후보생이 된 후엔 강인한 군인이 되고 싶다는 의지에 뜨거운 땀을 쏟았다.


 그때 무수히 흘렸던 땀은 지금의 나를 강인하게 만들어주었다. 음악 녹음을 할 땐 다음날 해가 뜨기까지 지치지 않고 끝까지 완성할 수 있는 의지,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때 막히는 부분이 있어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알아보며 과감하게 내질러도 볼 수 있는 용기. 이러한 것들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 흘린 무수한 땀 덕분이라 생각한다.

 또한 지금의 내 눈엔 총기와 기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20대 초반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어느정도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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