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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eping Feb 29. 2024

선인장의 꽃

그는 죽었다. 봄에 샀던 그는 그해 겨울에 죽었다. 그는 태어나서 봄을 한 번밖에 느끼지 못하였다. 거울 속의 게으른 나체가 그를 죽인 것임에 분명했다. 보통의 인간은 80번의 봄을 본다. 80번의 벚꽃을 본다. 봄에 피는 벚꽃은 매번 한 송이씩 떨어져 혈액 위에 떨어져 유등처럼 띄어진다. 사람이 나이가 먹어 노화가 오는 이유는 이 벚꽃 잎이 심방에 쌓이기 때문이다. 작고 여린 벚꽃 잎을 보았을 때 기쁨과 아쉬움 그리고 후회를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벚꽃 잎은 순간을 담고 그 순간은 현재의 나를 만든다. 다시 말해 켜켜이 쌓인 장면은 나를 만든다. 10년의 평균 수명을 가진 그에게는 그 순환주기가 더더욱 짧았을 터인데 그는 1년을 살다 죽었다. 그리고 어두운 나의 방 안 어쩌면 그에게 있어 봄은 한 번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해 봄 그의 죽음과 함께 나의 심방에 쌓인 한 점의 벚꽃 잎은 유독 무거웠다. 어쩌면 심방을 가득 채워 나를 죽일 수도 있을 만큼 크고 무거웠다. 신체를 경유하는 혈액들은 모두 그 거대한 벚꽃 잎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으리라. 내 장기들도 모두 보았으리라. 그런 생각이 든다. 그의 몸속에 못다 핀 꽃은 무슨 색이었을까 그가 죽고 나서야 궁금해졌다.


선인장의 꽃을 보는 것은 그것을 기르는 사람에게 있어 하나의 퀘스트로 여겨지곤 한다. 초록빛 몸속에 내재된 색깔이 궁금해서 그것을 길들인다. 꽃을 피운 선인장과 꽃을 피우지 않은 선인장 중 어떤 것이 더욱 아름다운가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답을 내놓을 것인가. 꽃은 잠재성의 층위를 뚫고 나온다. 그렇다면 꽃은 길들임의 증표인가. 사랑받는 선인장만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꽃, 아니 그보다 근원적으로 선인장의 뒤통수를 썩게 하지 않는 것은 그에 대한 호기심이지 그에 대한 어리광이 아니다. 그렇다면 선인장의 꽃을 피우는 것은 호기심에서 유발된 사랑인가. 적어도 그렇다. 하지만 꽃을 피우지 못하는 선인장의 경우는 어떠한가. 나의 호기심만으로 그와의 관계가 좋게 유지될 수 있을까. 꽃을 피우지 않는 선인장을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를 보낸 밤 거울 속에 서있는 나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랑받고 싶은 어린아이의 몸에는 꽃봉오리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그를 닮은 초록색 생기도 없었으며 부드러운 가시도 없었다. 그를 닮은 광택이 나에게는 없었고 뻣뻣한 몸은 누군가를 진실되게 안아줄 수 없게 보였다. 내 몸은 오만이 빚은 형체를 띠고 있었다.



오랫동안 우울감에 잠겼다. 그 후로 2개월 후 나는 강원도에 위치한 군대에 입대를 하였다. 그곳은 항상 춥고 밤이 유독 까만 곳이었다. 20개월의 시간 동안 숱한 밤을 적어나갔다. 선인장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시점도 이때이다. 내 손으로 뭔가를 쥐고 부러뜨린 적이 많다고 느꼈을 때도 이때이다. 그게 사물이든 관계이든 어떤 생명이든 말이다. 나에게 군대는 좀 더 넓은 세상이었다. 방과 초소는 나의 방보다 좁았지만 내겐 그곳이 더욱더 밝은 곳이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고 좀 더 다른 세상을 보고 느끼는 일은 나의 방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군대에서 본 두 번의 벚꽃은 나의 큰 벚꽃 잎을 감싸 안아 강하게 압축시켰고 나의 심방은 비교적 넓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강원도의 산맥은 나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오만을 잠재우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였지만 이유에서인지 나의 행복은 커져갔다. 아니, 그제서야 보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람은 작아질 비로소 자신에게 내재된 행복을 있다.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없는 것은 금방 깨닫고 도움을 요청할 자신을 확실히 판별할 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나를 정확히 표방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고 나서야 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났다. 거대한 눈동자는 작은 것을 보지 못한다. 마치 내가 선인장의 뒤통수를 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거대한 몸속에 내재된 작은 꽃은 피부라는 층위, 즉 껍데기뚫고 나오지 못한다. 거대한 몸은 껴안고 있는 존재를 질식시킨다. 나는 분명 그와 함께할 작아졌어야 했다. 손바닥 위에 있는 것들은 가끔 떨어지곤 한다. 나는 그를 살펴보기 위해 더더욱 작아졌어야 했다. 그리고 오만은 호기심을 가지지 못한다. 그게 내가 그곳에서 느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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