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팬지 May 29. 2024

내가 겪은 상실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살아'가는 

나를 7년 동안 키워준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 학교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고 있던 나의 현실을 더 슬퍼하지 않았나 싶다.


하루에 말 한 번이라도 섞을까 말까 하는 아버지가 투병 중이실 때는,

난 절대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슬퍼하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정신을 잃고 쓰러질만큼 충격이 컸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생기거나, 다른 사람에게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말을 듣는 일이 생기면 아버지를 원망하기 바빴다.

'왜 우리를 두고 가서 이렇게 고생하게 해?'

'왜 우리를 불쌍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어?'

한 일이년은 '아빠'라는 단어 소리만 들어도 울었다.


큰아버지 가족과 우리 가족이 같이 찾아가면 할머니는 항상 목놓아 땅을 치며 우셨다.

며느리와 아이들만 오니, 든든한 아들 둘의 모습이 생각나신 거다.

큰아버지와 함께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슬퍼만 하다가 돌아가셨을 때는,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싶었다.

한 번의 상실도 적응하기 어려운데 세 번의 상실이 연속으로 다가왔다.


중학교 때 친구들을 여럿 사귈 수 있게 도와줬던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자책하기 바빴다.

만나자고 했을 때 만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내가 힘들 때는 손을 내밀어줬던 친구인데 나는 내밀어 주지 못해서.

'뭐가 널 힘들게 했니?' 마음속으로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원치 않던 가족 사업을 맡게 됐을 때는 24시간 몸을 갈아 넣으면서 열심히 일했다.

투자했던 금액조차 온전히 받지 못하고 폐업했을 때는, 씁쓸했다.

계속 나에게만 불행이 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상실'을 내가 겪어봤으니까, 내가 떠난 뒤에 내 주위 사람들이 겪게 될 '상실'이 싫어서

열심히 버텼다.

살기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만 왔다.


더 '살기'만 하는 건 너무 어렵다고 깨달았을 때, 처음부터 다시 하나하나 고쳐 나가기로 했다.


7년동안 키워주신 할머니와 큰아버지는 내가 혼자서 인사드리러 갈 수 있을 때까지 잠시 그리운 마음을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인사드리러 갔을 때 건강한 마음가짐과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게 노력하기로 했다.


 '왜 항상 나쁜 일이나 안 좋은 일만 생기면 떠난 사람을 원망할까?'

책에서 본 유가족이 자신이 후회되는 점을 이야기 할 때 한 말이다.

치료만 받다가 항상 찡그린 얼굴이었던 아버지가 유일하게 편한 표정을 지은 게 돌아가셨을 때였다.

그제서야 마음이 편해지셨을텐데 10년 넘게 원망만 하고 살아서 죄송스럽다.

좋은 일이나 기쁜 일이 생기면 아버지가 하늘에서 마음 써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친구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은 추모공원에서 중학교 때 표현하지 못했던 고마움을 이야기하며 마음을 조금 덜었다.

사업은 집에 빨간 딱지가 붙여지는 그런 엔딩이 아니었음에 감사하며.


이렇게 작은 파도가 계속 일렁이다 보면, 큰 파도가 와서 슬픔을 싹 없애주겠지.






이전 09화 우울함 뒤에 발견한 후회되는 과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