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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우아 Oct 30. 2024

철학적 좀비

책방아지트를 힘겹게 버티고 있는 나는 살아있을까? 뉴스를 보고 있으면 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갈수록 심각할 정도에 이르렀다. 책방지기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려운 것 같았다. 사람들의 관심이 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때로는 나를 패배시키는 듯한 책방아지트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때마다 살아있을까를 고민했던 특별한 이유는 뭐였을까? 정답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다소 엉뚱해 보이는 질문 같아도 바로 여기에 질문에 대한 답이 숨어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믿음만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갈 수 없으니까. 


삶은 총성없는 전쟁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욕망들이 있다. 욕망이란 자기가 누구이며, 하고 싶은 뭔가를 알고 싶은 것.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욕망을 찾고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욕망의 굴레에서 생긴다. 일종의 ‘번아웃(burnout)’에 빠져버리는 욕망이다. 번아웃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불타버린 연료와 같이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무기력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영혼은 쓸쓸해지고 삶은 무의미해진다.


흔히 행복한 삶을 말할 때 돼지와 소크라테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해왔다.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오늘날에도 소크라테스가 삶에 미친 영향은 매우 유용하다. 그래서 누가 봐도 돼지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꿀꿀거리며 탐욕스럽게 먹는 돼지를 좋아할 리 없다. 당연히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무엇보다도 철학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배부른 돼지가 삶의 물질적 행복이라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삶의 정신적 행복이다. 


사람들이 삶이 무의미하다며 의욕을 상실하는 경우 괴로움이 곱절로 늘어나게 되며 병든 사람처럼 시들시들해진다. 마치 벽을 마주한 듯한 무력감에 지칠 때로 지쳐 쓰러지고 만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의미 없는 삶을 허무하게 끝내는 경우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삶이 겨우 물질적인 행복이라고 하면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서로 방식이 다를 뿐 돼지와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결론은 다르지 않다. 문제는 결론이 같다고 해서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동일시하는 착각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나도 배고픔보다는 배부름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즐거움은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낫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다. 


생각해보면, 배부름은 유쾌하고 배고픔은 유쾌하지 않다. 또한 돼지는 유쾌하지 않지만 소크라테스는 유쾌하다. 그래서 쾌락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배부른 돼지는 불행하고, 쾌락을 계속해서 멀리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행복하다. 삶의 의미가 죽음으로 가까워질 때일수록 우리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야 한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 


책방아지트라는 나만의 공간에서 최소한의 돈이 들어와도 해맑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나에게 뭔가 편안함을 주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를 변명 삼아 10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겁도 없이 그만두었다. 잘될 거라는 혼자만의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최소한 일한 만큼 월급이 나와 편안했다. 그러나 더 이상 편안한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비록 대단한 것은 적고 없고 부족한 것은 많지만 책방아지트를 유지하며 편안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책방아지트가 망하지 않고 잘 버틸 수 있음에 감사한다. 결코 팔자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왜 배부른 돼지는 슬픈 영혼일까? 인간의 의식을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사고 실험을 알게 되었다. 바로 데이비스 챠머스(David Chalmers)가 제시한 ‘철학적 좀비’라는 가상의 존재다. 보통 좀비라고 하면 공포영화 「부산행」에 등장하는 ‘살아있는 시체’를 떠올린다. 좀비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은 눈이 돌아가고 팔다리가 꺾이면서 온몸을 비틀거린다. 또한 소름 끼치는 굉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와 괴력으로 사람들을 하이에나처럼 물어뜯는다. 좀비가 다른 괴물과는 다르게 좀처럼 잊히지 않는 충격과 공포를 주는 까닭은 사람이 사람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듯 좀비는 아무런 의식이 없다. 오로지 맹목적으로 공격할 뿐이다. 공격의 대상이 친구이거나 가족이거나 아무런 상관없다. 좀비에게는 모두가 동물로 보이니까.


하지만 철학적 좀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가 아니다. 철학적 좀비는 외형상으로는 우리와 똑같이 행동한다. 문제는 머릿속은 전혀 다르다. 어쩌면 머릿속은 좀비와 같다. 좀비가 아무런 의식 없이 괴물처럼 행동한다면 철학적 좀비는 아무런 의식 없이 사람처럼 행동한다. 가령, 우리가 맛있는 과자를 먹는다면 철학적 좀비는 그냥 과자를 먹을 뿐이다. 우리는 기쁨이나 슬픔이라는 복받치는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철학적 좀비는 그냥 눈물을 흘릴 뿐이다. 이렇듯 철학적 좀비는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마치 살아있는 기계같다.


나는 본능적으로 우뇌를 자극하며 상상력과 감정을 풍부하게 했다.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내 안의 모든 감각이 살아 숨 쉬었다. 동시에 삶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발견하였다. 지금의 나에게는 책방아지트가 삶의 원동력이다. 어디 그뿐인가? 미래를 밝히는 희망의 공간이다.  소크라테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배고픈 공간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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