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 한적한 동네에 책방아지트를 마련하여 집필실로 사용하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만의 방』에서 여성이 글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집에 자기만의 방이 있는 것은 곧 자기만의 낙원을 갖는 일이다. 책을 읽기 위해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집보다는 독립적인 공간에서 읽고 쓰는 일이 더 편하고 즐거웠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마음껏 사색할 수 있는 자유는 얼마나 멋진 꿈인지 모른다.
이런 멋진 꿈을 실현하기 위해 조금은 과감하면서도 무모하게 직장을 퇴사했다. 그리고 다행히 지인의 도움을 받아 전망이 좋은 곳에 책방아지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사람들 발길이 드문 곳이었지만 고즈넉한 동네는 나름대로 산책하기 좋았다. 내가 원하는 건 욕심이 아니라 겸손이었다. 책방아지트를 하면서 욕심을 가지고 책을 상품으로 팔고 싶지 않았다. 더더욱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려고 과장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책에 대한 최대한 예의였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내가 꿈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다만 현실이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책방아지트를 운영하는 데 쓰이는 고정비용이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무모한 도전 때문에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난감한 생각만으로도 활기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무지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지 않았다. 찰리 채플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멀리서 동경하던 삶을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그럴 때마다 책으로부터 벗어나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책으로부터 위로와 용기를 받았다. 절망의 순간 책은 내 심장을 두드렸다.
그렇게 해서 류시화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와 인연이 만들어졌다. 이 책에는 ‘84번째 문제’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농부가 붓다를 찾아와 답답함을 토로했다. 작년에 비가 많이 와서 농사를 망쳤는데 올해도 또 비가 많이 와서 걱정이라거나, 내 아내는 좋은데 잔소리가 많아 피곤하다거나 등등 계속해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붓다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의 대답은 정반대였다. 농부의 믿음과는 달리 그를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농부가 섭섭한 마음에 이유를 묻자 붓다는 사람은 각자 83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열심히 노력하면 한두 가지는 해결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뫼비우스 띠처럼 생겨나고 만다. 그래서 붓다는 어느 누구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농부는 화가 나서 붓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농부에게 붓다는 자신과 다른 지혜로운 분이 아닌가? 그런 분이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붓다의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농부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연거푸 흘러나왔다.
이에 대해 붓다는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84번째 문제’였다. 앞서 붓다는 사람이 83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이제와서 84번째가 문제가 있다고 하면 생각지도 못한 고민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하지만 84번째 문제는 이전의 83가지 문제와는 달랐다. 어쩌면 84번째 문제는 83가지 문제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붓다가 말한 84번째 문제는 ‘모든 것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마음’이었다. 다시 말하면 ‘문제를 발견하는 문제’였다. 그러니 84번째 문제를 깨닫고 그것에서 벗어난다면 비로소 번뇌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내가 견뎌야 할 일상이 많아질수록 나 또한 84번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를 발견할수록 삶은 문제가 수두룩했다. 눈에 거슬리는 사소한 일 앞에서도 짜증을 내며 쉽게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불편함을 견딜 수 없는 나를 발견했다. 문제에 대한 투명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정작 현실은 불투명했다.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이 없다고 하면 그게 큰 걱정이었다.
나는 문제를 담뿍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를 참아내려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좋다. 소금물에 푹 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면 된다. 문제의 원인을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사람이, 내가 생각한 꿈이, 내가 생각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인생이 100% 될 확률은 거의 없다. 바꿔말하면 내가 인생의 문제를 100% 이해할 수는 없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인생으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거꾸로 다른 사람이 생각한 인생이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관계의 양면성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를 발견하는 84번째 문제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문제를 발견하는 마음에 있어 시행착오는 대개 비슷하다. 그토록 고대하던 내가 생각한 인생이 곧 나의 편견과 아집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거창하게 붓다가 말한 해탈의 경지까지 읊조릴 필요는 없었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결국 84번째 문제는 없어야 한다. 84번째 문제는 내게 삶을 온전히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었다. 사랑은 언제나 절망보다는 크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