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흔들린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독서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책방아지트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모든 좋은 것은 결국 행복을 가져다주는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욕망하는 이름은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모든 좋은 것은 행복이라는 말에는 같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꿈을 가지고 있어 좋은 것을 만드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 꿈을 만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좋은 것이 하나, 둘 생기면서 꿈이 만들어졌다. 진정으로 모든 변화는 꿈으로부터 일어나는 것 같았다. 가슴 속에 온전히 품고 있는 열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노력은 꿈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꿈은 행복의 문이다. 꿈을 통과해야 행복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좌우할 만한 꿈을 선택하는 데 우여곡절을 피해 갈 수 없다. 우리가 마주하는 사소한 갈림길과는 달리 인생의 갈림길은 외롭고 어려운 선택이다. 문득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일생일대의 선택이라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아닌가? 내가 선택한 꿈에 대한 두려움을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진짜 두려움은 후회였다. 꿈을 빈틈없이 성취하고 싶다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괜히 욕심을 부렸나? 라는 후회가 드문드문 생겨났다. 그때마다 시선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마나 다행스런 일은 꿈을 갈망하면서 곁눈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갈망할 만큼 결과를 만들지 못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그 자체로 만족감은 있었다. 꿈을 갈망하면서 계속해서 곁눈질만 했으면 슬퍼했을 것이다. 영양가 없는 후회이니까.
매번 실패를 겪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으로 마음이 심란해진다. 세상은 매정하게 나에게 등을 돌린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하는 일이 술술 잘 되는데 왜 나에게만 혹독한 시련이 불어닥치는지 의심한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인생 역전의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행운은 말 그대로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같다. 가짜 행운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가짜 행운을 막는 바리케이드 같았다. 돛단배를 타고 망망대해에서 고기잡이하는 산티아고 노인은 ‘살라오’라고 불린다. 스페인어로 살라오는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조금이라도 운이 있었다면 노인은 적어도 몇 마리 물고기를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가장 운이 없을 정도로 83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노인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가까워졌다고 지레짐작할 수 있다.
솔직히 나도 이 소설의 몇 페이지를 읽고 노인의 운이 다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늙어갈수록 운이 좋아질 확률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세상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끈질지게 바다로 나갔다. 한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어부의 자부심을 끝까지 지켜냈다.
노인의 커다란 용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고결한 품성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로부터 운이 다했다, 는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면 어깨가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때로는 꼰대짓을 하며 자기를 극구 변명할 수 있다. 하지만 노인은 이 모든 것을 외면하며 묵묵히 바다로 갔다.
바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바다의 끝이 어디인지 누가 알 수 있을까? 바다의 끝을 모르기 때문에 노인의 무모함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바다의 끝을 알았다면 노인은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에게 운이 다했다, 는 비난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노인에게 중요한 것은 운이 아니라 ‘패배’였다. 노인은 패배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진실과 충돌하며 자기 자신을 증명하였다. 그리고는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다”는 위대한 말을 이야기하였다.
사전적으로 파멸은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이고, 패배는 싸움에서 겨루어서 지는 것을 말한다.감정적 온도로 보면 파멸과 패배의 기분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가끔은 비슷하기도 하고, 대충 생각해봐도 상당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노인은 파멸해도 좋으나 패배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노인과의 물리적 거리도 있겠지만 노인의 말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패배가 원인이라면 파멸은 결과이지 싶었다.
그러나 헤밍웨이 작가의 의도를 알고 나서 노인에 대한 혼란스러운 침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 삶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없지만 노인의 말은 납득할 수 있는 문장이 되었다. 작가는 노인을 패배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작가는 끝까지 패배의 고통을 이겨낸 노인의 입을 빌려 물질적 승리와 정신적 승리를 이야기했다. 파멸은 육체적 승리, 패배는 정신적 승리를 말한다.
『노인과 바다』가 보여주듯 정신적 승리는 외로운 싸움이다. 동시에 논리로는 납득할 수 없는 감정이다. 이러한 맥락은 노인이 ‘사자 꿈’을 꾼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우리 모두는 정신적 승리를 꿈꾼다. 정신적 승리를 하려면 외로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사자 꿈을 꾸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책방아지트를 하고 있는 나에게도 노인과 같은 순간이 올 것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순간, 나 역시도 운이 다했다는 상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자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 행운인지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