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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우아 Nov 08. 2024

흑건

책을 좋아한다. 좀 더 고백하자면 혼자만의 비밀 여행을 좋아한다. 오염된 세상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마다 책은 위로가 되었다.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데 있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책은 고요해서 더욱 좋다. 고요한 침묵 속에 있으면 어느 순간 내 안에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하나, 둘 모인다.  


사랑이 뭘까? 사랑이라는 흔한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힘들다. 사랑에 대해 계속해서 궁금해하면서도 정작 명쾌한 정답을 서로가 모른다. 아마도 사랑이 비밀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알 듯 모를 듯한 그 사이 어디쯤에서 서로에 대한 열정적인 감정이 생겨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활동도 비밀스러워진다. 사랑은 비밀이며, 비밀에 전염된 우리는 정체를 알기 힘든 어떤 운명을 만나게 된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면서 두 가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흑건’이다. 이 영화에서 자주 회자되는 장면이 ‘피아노 배틀’이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남자 주인공 상륜의 현란한 손놀림을 잊을 수 없다. 그 정도의 빠른 손놀림이라면 순식간에 원고지 천 매 분량의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유쾌한 상상을 해보았다. 


그때 피아노를 치는 그를 보고 있는 누군가가 “흑건”, “백건”이라고 이야기했다. 흑건, 백건이라는 말을 간추려보면 ‘흑건을 백건을 바꿨다는 것이다. 흑건이 뭘까? 클래식의 문외한이라 흑건, 백건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자 주인공이 연주한 피아노 음악은 쇼팽의 'Etude Op. 10, No. 5'이었다. 에튀드는 연습곡이라는 뜻으로 피아노를 연습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코스를 말한다. 


폴란드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인 쇼팽은 200여 개의 피아노 작품을 남겨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린다. 쇼팽의 연습곡은 단순한 기교가 아니었다. 작품성이 뛰어날 정도로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서 묘한 쾌감을 들려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Etude Op. 10, No. 5는 오른손이 ‘C’ 음을 제외하고 모든 음을 검은 건반으로 연주해서 ‘흑건(black keys)’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숨기고 있는 아련한 비밀, 그래서 더욱 말할 수 없다. 말을 하게 되면 비밀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비밀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말할 수 있는 비밀과 말할 수 없는 비밀. 마치 피아노의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이 나란히 있는 것과 같다. 말할 수 있는 비밀이 하얀 건반이라고 했을 때 비밀은 밝고 투명하여 언젠가는 말하게 된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검은 건반이라고 했을 때 아픈 상처는 곧바로 침묵하게 됩니다. 침묵이 계속되면 비밀은 결코 사라지지 않게 된다. 침묵, 그러니까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검은 빛깔이 된다.


말하고 싶은 데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말을 해서 상처를 받을 경우에는 차라리 침묵하는 게 훨씬 좋다. 반대로 말을 해서 위로를 받을 경우에는 굳이 침묵하지 않아도 된다. 다시 말해 말할 수 있는 비밀이 ‘작은 침묵’이라고 하면 말할 수 없는 비밀은 ‘큰 침묵’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쇼팽의 흑건을 연주하는 것인지 모른다. 침묵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침묵은 삶에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으며 이러한 비밀을 마주하는 순간 삶을 더욱 사랑하는 법을 연습하게 되니까.


다른 하나는 바로 ‘사랑’이다. 어쩐지 낭만적인 제목을 가진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청춘남녀의 풋풋한 사랑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동시에 모든 것의 비밀이 가능해진다. 생각해보면 사랑은 너무 절묘해서 순수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하게 되는지 모른다. 사랑과 비밀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비밀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삶에서 제법 순순히 일어난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를 보여준다. 영화 속 음악의 주인공인 쇼팽이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인이 조르주 상드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10년 동안 함께 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은 그들의 사랑은 결국에는 상처로 얼룩지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감독은 쇼팽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면서 사랑의 상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되묻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랑의 아픔이 있더라도 사랑은 비밀스럽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사랑은 계속된다. 하지만 사랑의 비밀은 어떤 방식으로든 끝나게 되어 있다. 이별이 작은 상처라고 한다면 죽음은 큰 상처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랑의 상처가 있다고 해서 결코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커다란 울림이다. 


사랑의 상처 때문에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조르주 상드의 「상처」를 읽어보면 어떨까? 그녀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꽃을 꺾기 위해서 가시에 찔리듯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의 상처를 견뎌낸다.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으므로. 사랑하라. 인생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이다.” 


사랑의 가시를 생각할수록 슬픈데,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때로는 기쁘다. 사랑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충만해졌다. 미움도 없이 후회도 없이 미련도 없이 오직 사랑하기를, 나는 소망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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