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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우아 Oct 09. 2024

말의 부적

마음의 묵은 때를 벗겨내기 고요한 계절이 봄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여기저기서 꽃이 피는 봄은 감동의 계절이다. 우리도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봄 향기를 만끽한다. 한 해를 시작하는 설렘이 있고 동시에 충만함이 가득하다. 오죽했으면 입춘(立春)에 맞춰 집집마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한자를 붙여놓았을까. 어릴 적에는 단단하고 굵직한 글씨가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으나 나이를 먹고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봄이 왔으니 그런 만큼 좋은 일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부적이라는 것을.


책방아지트에도 봄이 왔다. 책방아지트를 다시 한번 정리할 시간이다. 겨울에는 모든 것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이제 봄이 왔으니 두꺼워진 감정을 말끔히 걷어내야 한다. 지나온 날들에 대한 어수선한 감정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지 않다. 물론 스스로 낙관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험난한 세상에서 책방아지트와 동행하며 이 정도 묵묵히 걸어왔으면 괜찮게 살아왔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책방아지트 앞에 서 있는 벚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벚나무는 봄이 오기 전부터 살아가기 위해 꽃망울을 하나하나 만들고 있었다. 머지않아 겨울을 이겨낸 나뭇가지에서는 응답하듯 꽃이 피고 잎이 풍성해질 것이다. 나뭇 한가지에 많은 꽃이 피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선물이다.


겨울에 휘청거렸던 마음을 위로 하며 서가를 둘러보다가 뜻밖의 책을 발견했다.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말의 선물』이었다. 아마도 읽으려고 책을 샀다가 정작 읽지 못했다. 결국에는 침묵하고 말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선물 같은 책은 머리로 이해하기 앞서 가슴에 먼저 와 닿는다. 그래서 선물 같은 책은 뜻밖의 기쁨을 준다.


『말의 선물』은 아름다운 제목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의 무뎌진 오감을 차분하게 지나가면서 심금(心琴)을 울린다. 심금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말 하나하나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말이 가슴에 와 닿으면 쉬이 지나가지 않고 기꺼이 마음의 현(弦)을 울린다. 심금을 울리는 말 덕분에 책이 계속해서 존재하게 된다.


작가에 따르면 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읽은 책’과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여기에서 읽을 수 없는 책이 어려운 숙제다. 읽을 수 없는 책이라고 해서 정말로 읽을 수 없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언젠가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읽고 싶은 책이 나오면 마음이 한순간에 바뀐다. 그래서 읽을 수 없는 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책을 사게 된다. 비록 읽을 수 없는 책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면 왜 읽을 수 없는 책을 사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 보통 이런 경우 읽을 수 없는 책은 장식용이 되고 만다. 읽은 책을 읽고 나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사는 것으로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다. 나 또한 책을 쓸데없이 사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책 욕심이 너무 앞서다 보니 살까 말까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책을 사 놓고도 제대로 읽지도 않았던 것은 또 어떤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아니다. 작가는 『말의 선물』에서 그것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을 사지 말라는 것은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음식은 우리들의 뼛속 깊은 곳까지 새겨지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불행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서글픔이다. 


작가는 읽을 수 없는 책의 쓸모 없음에 대해서도 유쾌한 반론을 펼친다. “책 자체를 사랑스럽게 느낄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거듭 말했다. 책의 내용을 몰라도 책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읽을 수 없는 책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읽을 수 없는 책에서도 얼마든지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책은 읽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읽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에는 말이 담겨있고 말에는 정신이 담겨있다. 다시 말하면 말의 정신을 담아낸 것이 바로 책이다. 책을 정리하며 나는 말의 정신과 말의 등불이 동의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속에 정신이 잘 담겨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말이 어긋나게 되면 말을 알아듣기 어렵거나 제대로 전달할 수도 없다. 말의 등불도 마찬가지다. 말이 너무 밝아서도 안 되고 너무 어두워서도 안 된다. 말은 등불처럼 사랑스러워야 한다. 사랑 없는 말은 진실을 말해도 진실이 전달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말을 보내라

그 사람을 수호할 

말의 부적을 보내라

썩지 않을 것을 

바치고 싶다면

말을 보내라     


오랫동안 책과 끊임없이 말을 나누다 보니 ‘말의 부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부적(符籍)이라는 말이 이렇게 긴밀하게 쓰일 줄 몰랐다. 부적은 악귀를 쫓아내고 복을 가져다주는 용도로 쓰인다. 부적을 품속에 가지고 있으면 모든 불길한 기운들을 피해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이에게 허공으로 흩어지는 말은 귀신처럼 상처로 남는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의 부적을 보내라는 건 너무나 사랑스러운 말이다. 


왜 책을 읽어요? 라는 질문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마음의 양식이라는 진부한 대답으로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삶이 팍팍해도 부적을 지님으로써 고독한 삶을 살아가듯 읽은 책, 읽을 수 없는 책이 부적으로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슴 속에 영원히 변하지 않을 말의 부적, 사랑하는 이에게 책을 선물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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