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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우아 Oct 09. 2024

연필 같은 사람

책방아지트를 운영하는 책방지기 이전에 나는 오랫동안 탐서주의자(耽書主義者)로 살아왔다. 탐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책의 내용이다. 내 생각에 좋은 책은 일목요연하게 정답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정답보다는 질문을 던져야 하고 질문을 산책하면서 질문을 찾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용만으로 좋은 책이 될 수 없다. 내용만큼이나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독성은 독서의 맛을 내는 선택이 아닌 필수요소다.     


탐서주의자는 활자로 밥을 먹고 산다. 내가 선택한 활자는 수필(隨筆)을 쓰는 것이다. 수필은 소설, 시와 달리 창작의 고통에 있어 조금은 자유로운 편에 속한다. 하지만 붓 가는 데로 누구나 쓴다고 해서 수필을 쉽게 쓸 수 있는 것은 섣부른 다짐이다. 어느 정도는 문장력이 있어야 읽는 맛이 생긴다. 기분 내키는 대로 대충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넋두리이거나 징징거리는 같아서 눈에 거슬린다. 다시 말하면 활자 생산자에게 비문(非文)은 죽음보다도 더 치명적인 악필(惡筆)이다.    

 

그래서 활자 생산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필사(筆寫)를 꾸준히 해왔다. 물론 다독(多讀)을 빼놓을 수 없다. 일찍이 다치바나 다카시는 “괜찮은 글 한 페이지를 쓰려면 100페이지의 독서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00% 공감하는 내용이다. 다독하지 않으면 글쓰는 힘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는 게 바로 글쓰기의 연금술이다.     


초보 글쓰기 시절, 나는 책에 밑줄 긋는 사람이었다. 책을 읽다가 간직하고픈 글이 있으면 밑줄을 긋었다. 그러다가 책의 맨 앞뒤 페이지에 상관없이 여백이 있는 곳에 흔적을 남기는 메모하는 사람이 되었다. 메모를 보기만 하면 이 책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활자 생산을 하는 사람이 된 시점에서는 고민이 깊어졌다. 밑줄 긋거나 메모만으로 뛰어난 문체를 생산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다.     


글쓰기가 일종의 편집이라고 한다면 밑줄이나 메모는 소스의 역할을 한다. 결국 소스를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글쓰기의 효과를 만끽할 수 있다. 내가 필사하는 사람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사는 말 그대로 베껴 쓰기다. 책 속의 인상적인 글을 그대로 옮겨적는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베껴 쓰는 것은 글쓰는 입장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신에 필사할 때 연필로 꾹꾹 눌러쓰면 여러 가지 효과가 나타난다. 우선적으로 문장력이 향상된다. 작가의 생각이 어떻게 마음 밖으로 표현되는지를 알 수 있다. 때로는 내 생각이라고 믿고 싶지만 어떤 문장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경우도 있는 법이다. 다음으로 호흡법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쓰다 보면 문장을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지 몸소 느낄 수 있다. 호흡이 불안하면 가독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연필로 글을 시대는 아니다. 점점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에 살다 보니 손의 노동 또한 편리해졌다. 덕분에 생각의 날개를 자유롭게 펼치며 날 수 있다. 틀린 생각을 지우고 또 지워야 하는 연필의 불편함을 생각하면 컴퓨터 작업은 훨씬 깨끗하고 유쾌하다 얼마든지 틀린 생각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필사를 하고 있다. 활자 생산이든 마음의 힐링이든 필사하기 좋은 문장을 보면 반갑고 설레기 마련이다. 필사하면서 사뭇 달라진 지점이 있다면 연필에 대한 생각이다. 연필을 통해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단순히 연필을 필기구라고 생각했었는데 필사를 하고 보니 연필에 대한 감각이 상실되었다는 아쉬움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컴퓨터로 쓴 글씨를 보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연필로 쓴 글씨는 필사적(必死的)이다. 비록 다른 사람의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내가 쓴 것 같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럴 때 연필은 문장을 옮겨 적는 존재가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다. 연필은 삶의 창을 비추는 광학기구다. 그래서 필사하는 사람은 꼬박꼬박 연필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     

 

고백하자면 몇 년 전만 해도 필사에 대해 마뜩잖게 생각했었다. 필사가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시시각각 의심하게 되었는데 진심으로 필사를 해보니 필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비로소 연필 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연필 같은 사람’

할머니가 편지를 쓰는 손자를 보면서 ‘연필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장차 손자가 커서 조화로운 삶을 살기를 바랐다. 이유인즉, 연필에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 네게는 연필을 이끄는 손과 같은 존재가 있다.

둘, 가끔은 쓰던 걸 멈추고 연필을 깎아야 할 때도 있다.

셋, 실수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달려 있다.

넷,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피를 감싼 나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심이다.

다섯, 연필은 항상 흔적을 남긴다.       


연필 쓰는 사람은 연필 같은 사람의 덕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연필 쓰는 사람이 연필 같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연필 쓰는 사람이 필사의 앞모습이라고 한다면 연필 같은 사람은 필사의 뒷모습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앞만 보고 살아간다. 하지만 연필의 참모습은 필사의 뒷모습에 있다. 연필 같은 사람이어야 비로소 연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필 같은 사람이 되고픈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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