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인생이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답답함은 슬픔의 칼날이 되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쑤셨다. 책방아지트에서 불목하니로 살고 있어도 여전히 걱정이 수북하게 쌓였다. 내가 추구하는 삶은 돈이 아니라 의미였다. 그러나 두려웠다. 아무리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답답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낭만을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의 통로가 막힐 때마다 삼류(三流)로 살고 싶지 않았다. 삼류라는 말은 삼등(三等)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등(等)은 순위나 등급를 말하며 외면적 의미를 나타낸다. 반면에 류(流)는 위치나 부류를 말하며 내면적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등이 양적, 물질적이라고 한다면 류는 질적, 정신적이다. 류는 삶의 가치를 말한다. 가령, 시험 성적을 말할 때 내신 1등이라고 하지 내신 1류라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람의 품격을말할 때 일류 인생이라고 하지 1등 인생이라고 하지 않는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나에게 삼등이라는 순위도 꽤 높은 점수다. 남들처럼 어엿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으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책방아지트에 있으면서 여전히 자기 실현의 욕구를 버리지 못하고 거의 반백수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삼등 이하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류 인생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삼류 인생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달갑지 않다. 나쁜 사람이라는 평판을 주홍글자 마냥 달고 살아야 한다. 삼류는 열심히 자신을 가꾸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정신이 부족하다. 삼류는 미숙한 사랑을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사랑에 등을 돌린다. 무책임한 사랑이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아플 때 우는 것은 삼류이고, 아플 때 참는 것은 이류이며, 아픔을 즐기는 것이 일류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을 참아내려고 습관적으로 이불을 뒤집어쓰던 때가 오버랩되었다. 이러한 자발적 고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불이라는 선택은 순진했다. 결국에는 이불을 허탈하게 걷어차고 말았다. 이른바 이불 킥은 삼류의 방식이다.
그래서 삼류적인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좋아하는 나는 독서를 통해 긍정적인 자극을 받으며 지내왔다. 독서는 우울하거나 다운되는 기분을 회복하게 해서 내 일상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았다. 이불 킥이라는 닫힌 마음에서 벗어나 죽음 킥, 푼트 킥이라는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죽음 킥은 김영민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좋다』를 읽다가 이름을 붙인 단어다. 죽음 킥은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 보면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메멘토 모리의 입장에서는 삶이 곧 죽음이다. 죽음 킥을 날리기 때문에 삶이 확 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도 아침에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침의 주인공이 삶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려운 시절에 죽음은 안전지대였다. 그 쓸쓸한 마음 한구석에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무의미하게 사는 고통을 끝내겠다는 것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 죽음에 대한 연민이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더라도 고통의 탈출구로 여기는 방법을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과연 죽음이란 허무함이 전부일까? 아니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수록 살아났으면 좋겠다, 다시 숨을 쉬었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이 견고해지니까. 또한 죽음이 삶의 기반이 되는 감각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게 되니까. 이것이 죽음 킥을 하는 절박한 이유이다.
그래서 ‘푼트 킥(punt kick)’이라는 새로운 슬픔에 접어들었다. 존 케닉의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성 사전’이다. 이 책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신조어들이 나오는 데 그중에 하나 인상적인 단어를 알게 되었다. 바로 푼트 킥이다. 푼트 킥은 ‘지금껏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준 모든 방식이 더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는 이제 더 나은 존재가 될 때가 왔다고 느낄 때의 조용한 가슴 떨림’을 말한다.
이제까지의 상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는 푼트 킥은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섞여 있다. 변화를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원래의 상황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서늘하게 깨우치는 순간이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자기 객관화인 동시에, 이젠 비로소 새로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결단이다.
책방아지트를 시작할 때 얼마나 마음이 요동쳤는지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문득 삶이란 푼트 킥이라는 간극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놓쳤버렸다는 것을 서글프게 깨달았으며, 다시 뭔가를 시작해도 좋을 듯한 기분에 몸을 맡기게 된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자신의 내면을 되찾고자 하는 이상한 정열에 휩싸이게 된다.
삶의 빈자리를 느껴서 그런지 자꾸만 슬픈 쪽으로 움직여진다. 그러나 슬픔은 너무나 익숙한 슬픔(sadness)이 아니다. 슬픔이 서글픈 감정이라고 한다면 삶은 굳게 닫히고 만다. 하지만 진정한 슬픔은 삶을 활짝 열리게 한다. 활기 넘치는 솟구침이며 ‘극도의 만족(satisfaction)’이라는 아름다운 감정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푼트 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불 킥은 삼류고, 죽음 킥은 이류고, 푼트 킥은 일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