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筆名)이란 무엇일까? 요즘 말로 하면 닉네임이다.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글을 쓰는 이름이다. 별다른 고민 없이 자신의 성명(姓名)으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해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성명은 자신이 공부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또한 너무 추상적이라고 하면 뜻이 희미해지고 그렇다고 너무 쉬운 말로 하면 뜻이 허약해지기 마련이다. 적어도 필명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게 좋다.
책방지기의 필명은 ‘오우아’이다. 오우아! 상대방에게 말을 하다 보면 오우아라는 말이 감탄사처럼 들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엔 우스갯소리로 여겼으나 자주 듣고 보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우아라는 진실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다른 모양으로 바뀌기도 한다. 오우아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이 숨어 있다. 그 감정을 찾아내면 오우아는 감탄사가 아니라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에서 빌려온 말이다. 오죽했으면 ‘내가 나의 벗’이라는 자신의 병(病)을 담담한 어조로 고백했을까?
오우아라는 말에서 중요한 단어는 벗이다. 단순하지만 명쾌한 진리였다. 나의 벗이 누구누구라고 한다면 눈길을 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벗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아 왠지 모순처럼 들리면서도 어떻게 내가 나의 벗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동시에 이 질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나의 벗이 겹치면서 오우아라는 뜻이 비로소 정확해졌다.
18C 조선의 실학자 중에서 이덕무 선생의 치열한 삶을 보고 있으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책을 읽고자 하는 욕망이 선생의 책만 보는 바보이고자 하는 열망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癡)라고 부른 독서광(讀書狂)이었다. 치(癡)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병’이다. 간서치의 원인은 말 그대로 책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당장 밥벌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생은 “오직 책보는 즐거움에 추위와 더위, 배고픔도 전혀 알지 못했다”(『看書癡傳』)고 했다. 독서광에게 이보다 좋은 위로의 말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선생의 길을 묵묵히 따라 하면서 오랫동안 간서치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간서치들이 너무 많았다. 누구나 쉽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여서 그런지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말이었다. 알고 보니 간서치는 일반명사와 다를 바 없었다. 간서치들의 글을 읽어보면 명칭만 그럴듯하게 보일 뿐 그들이 진짜로 간서치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간서치가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간서치를 모르는 소리이다. 간서치에 대한 안목이 밝아지면서 간서치라는 이름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은 허학(虛學)에 가깝다.
이덕무 선생과 소중한 인연이 여기서 끝났는가 싶었다. 간서치의 매력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면서 의도하지 않게 필명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를 읽으면서 자신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눈 내리는 새벽, 비 오는 저녁에
좋은 벗이 오지 않으니 누구와 마주하며 이야기할 것인가?
내 입으로 글을 읽으니 이를 듣는 것은 내 귀이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이를 감상하는 것은 내 눈이다.
내가 나의 벗을 삼았으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내가 나의 벗을 이해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간서치라는 불치병에 걸렸을 때 나를 손님으로 대할지, 아니면 벗으로 대할지에 따라서 간서치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다. 먼저 내가 손님이 되는 경우 간서치는 책만 보는 바보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간서치에 대해 꽤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벗이 되는 경우는 보통 사람이라면 가지기 어려운 혹독히 단련된 실력(實力)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오우아라는 얘기다.
순간, 선생이 느꼈을 절대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와 닿았다. 내가 나의 벗이라는 목소리에는 한마디의 체념도 들리지 않았다. 선생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나 또한 몇 년을 간서치로 몸살을 앓던 시절이 있다 보니 선생의 즐거움을 이제는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오우아가 이치에 맞는지는 몰라도 간서치에 대한 까다로운 진실을 깨달았다. 다름 아닌 오우아가 간서치의 실학(實學)이었다는 것. 누구를 너무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를 너무 사랑해서 생긴 너무나 아름다운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상이 갈수록 책의 쓸모 없음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가본 사람이라면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은 책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책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다 보니 책방아지트 또한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간서치의 진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용(無用)한 열정이라는 고통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오우아가 있다. 얼마나 무용한 열정을 사랑했으면 그 사랑을 오우아라는 짧은 세 글자로 섰을까? 눈 내리는 새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만 보는 바보의 모습은 뭉클함이 되살아나오는 그림 같았다. 저 멀리서도 책 읽는 목소리가 눈발에 실려 오는 덧없고 슬픈 그림, 너무 쓸쓸하고 아픈데 아름다웠다. 더 아름다운 점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기어코 내가 나의 벗이라는 고독한 삶의 의지였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없이 책을 놓지 않았던 선생은 내게 없던 오우아라는 필명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나에게 오우아는 병명(病名)인 동시에 생명(生名)이었다. 그래야 제대로 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