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을 플라스틱 사출 회사에서 일했다. 오랜 공장 생활에 지쳐서 그런지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 어느 순간부터는 누군가 묻지 않아도 내 몸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싫어졌다. 기계는 특성상 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탓에 사람이 작동을 해야 비로소 생산적인 일이 가능해진다. 그럴수록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고약해졌다. 어쩌면 내 착각일 수도 있겠으나 혈관에서는 피가 말라갔다. 대신에 식용유처럼 보이는 윤활유가 흐르면서 마음이 부쩍 끈적거리며 불안지수가 높아졌다. 더 이상 계산 없는 머리로 지루한 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는 최악(最惡)의 상태였다. 평범하게 살면서 평범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토록 평범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어 나이 50에 책방아지트를 차렸다. 나이 50에 예전에 없던 꿈이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생겨난 것은 물론 아니다. 내 머릿속은 늘 어떤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나이 50에 접어들어 그토록 기다리던 꿈이 방향을 잡았다. 꿈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갖고 있는 것으로는 불편한 나이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꿈을 펼쳐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다시 말하면 제2 인생을 활짝 펼칠 수 있는 오십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살다 보니 인생은 제1 인생과 제2 인생으로 나눠지는 모습이다. 제1 인생은 바쁜 일상을 참아가며 버티는 삶이다. 반면에 제2 인생은 꿈이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삶이다. 제1 인생이 권태라고 하면 제2 인생은 욕망이다. 제2 인생은 제1 인생의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계속해서 알 속에서 있으면 나는 내가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갈 확률이 높아진다. 제2 인생은 관성이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2 인생은 상수(常數)가 아닌 변수(變數)로 작용한다. 인생 전체를 360도 바꿀 수 있는 커다란 변수이다.
이러한 변수를 수학 방정식으로 풀어나가는 소설이 있다.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이다. 지하생활자는 말 그대로 지하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는 호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못된 사람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세상천지를 다 짊어진 듯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속세에서 저만치 떨어져 사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까. 단순히 절망이나 고통과는 따위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이 소설에서 지하생활자는 스스로를 ‘아픈 인간’이라고 고백한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아프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가 아픈 이유는 햇빛을 싫어하는 데 있다. 그는 햇빛을 볼 수 있는 지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여전히 지하생활에 만족한다. 그가 심적으로 괴로웠던 것 만큼이나 자기 모순에 빠지면서 ‘자기 의지’ 말고는 다른 어떤 일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자기 의지가 왜 중요하나면 제2 인생을 절대적으로 고민하기 때문이다.
지하생활자는 자기 의지를 ‘2×2=5’이라는 방정식으로 풀이한다. 그러면서 2×2=5를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덧붙였다. 반면에 ‘2×2=4’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2×2=4는 정상적이며 합리적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법칙을 통해 계산이 가능한 지식을 배울 수 있다. 2×2=4의 경우 기적을 바라는 것은 멀고 아득하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거부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한다. 자연의 법칙에서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생각할 여지가 없다. 변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변하게 하려고 힘쓰는 일은 ‘합리적인 욕망’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합리적인 욕망은 불가능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하생활자는 일반적인 삶과 달리 ‘독립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독립적인 욕망은 그의 강렬한 영혼이다. 독립적인 욕망에 따르면 2×2=5이며 자기 의지이다. 합리적인 욕망이 정상적인 욕망이라면 독립적인 욕망은 비정상적인 욕망이다. 다른 이들은 지상에서 열심히 일하며 선량한 인간으로 산다. 하지만 그는 선량한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량한 인간도 아니었다. 누군가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는 독설적이며 반항적이었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이 그에게는 지옥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2×2=4는 죽음이었고, 2×2=5는 삶이었다.
만약에 독립적인 욕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지하생활자의 말을 빌려보면, 아무런 욕망도, 의지도 없다면 인간이라는 말이 공허해진다. 모두가 박자에 맞춰 소리를 내야 하는 운명이라면 ‘베럴 오르간의 스톱(stop)’으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오르간은 여러 가지 스톱을 사용하는데 스톱은 압축된 공기를 오르간의 파이프 랭크(pipe rank)로 들여보내는 장치다. 파이프 랭크는 각 음에 대해 동일 음색을 내는 점진적인 길이로 구성된 한 세트의 파이프를 뜻한다.
언제부터인가 2×2=5를 사랑했던 것 같다. 혼자 오래 사랑한 나머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2×2=5(吾)를 나 자신으로 법칙으로 여겼다. 나 오(吾)는 다섯 오(五)와 입 구(口)가 합쳐진 말이다.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너무 많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입을 다섯 개 가지고 있는 미래의 나를 상상했다. 2×2=4에서는 입(口)이 하나만 있어도 겨우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했던 공식은 아니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입이 있어야 2×2=5를 사랑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생긴다. 이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공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