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아지트는 일요일에도 꼬박꼬박 문을 연다. 아무래도 일요일에 손님이 오는 경우가 많다. 평일 중에서 하루를 선택하여 휴무를 하더라도 책방아지트를 운영하는 데 차질이 없었다. 하지만 책방아지트에는 정기휴무가 없다. 애초에 없었다는 게 사실이다. 남들 눈에는 굳이 일요일에도 문을 열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정확히 장사의 효율성만 따진다면 책방아지트는 꼴찌 수준에 가깝다. 일요일에 문을 닫아야 하는 게 가장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유별나다고 여길 것이다. 일요일이 없는 사람, 일요일이 있으면 마치 세상이 망할 것 같아 일부러 개미 같은 사람으로 변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했을 것이다. 결국에는 일요일이 왜 빨간 날인 줄 몰라 ‘일요일 안전 불감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나는 일요일 안전을 모르지 않았다. 일요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겨 언제나 일요일 안전의 스위치를 ‘ON’으로 해놓았을 정도다.
세상에는 일요일 안전보다 우선시 되는 게 많았다. 정신분석학자 산도르 페렌치(Sandor Ferencci)는 일요일에 스트레스가 높은 원인으로 ‘일요 신경증(Sunday neurosis)’을 진단했다. 일요 신경증은 바쁜 일상의 후유증이다. 일요일을 안전하게 보내려면 주중에는 숨 가쁘게 일을 해야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일요일이 되면 고장난 기계처럼 몸을 가누기가 어려워진다.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몸이 매트리스 속 깊이 가라앉는 것 같다. 먹는 것도 귀찮아서 거의 침대에만 누워있으며 무력감에 시달린다.
문제는 일요 신경증이 높을수록 삶의 만족도는 낮아지는 데 있다.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아쉬움이 머리를 아프게 한다. 머릿속이 온갖 잡념으로 끔찍하게 소란스러워진다. 일요일을 떠올릴수록 입에서 쓴맛이 맴돈다. 이와는 달리 『죽음의 수용소』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은 일요 신경증의 처방전으로 인간이 받은 가장 큰 선물을 말했다. 바로 ‘의미를 획득하려는 의지’라는 것. 결국 삶의 의미를 알아야 인생을 보다 가치 있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고민은 쓸모없는 열정이 아니다. 삶의 의미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가치 있는 삶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일단 자신에게 어떤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생산적인 생각을 해야 하고 목적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결국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혼란스러운 생각부터 정리해야 하는 게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 죽고 싶을 만큼 더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삶의 큰 선물을 받은 것일까? 선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무슨 일을 대하든 습관처럼 이 질문이 떠올랐다. 하루하루가 어제와 내일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군다나 똑같은 일상의 한계와 허무가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인생을 낭비하며 허우적댈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물은 내가 나의 삶을 견디기 방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의미를 깨달으며 얻은 것이 있다면 인생을 의식하게 되었고 간절한 일이 되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면 비슷한 일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크놀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일요일’이다. 주인공 크놀프는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고 싶다고? 처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지내고 싶은 달콤한 게으른 자의 변명으로 들렸다. 자나깨나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말하는 ‘일요일’의 멘트는 현실의 궤도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크놀프는 일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대신에 여행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일에 대한 직업적인 생각이 없다고 해서 그가 전혀 재능이 없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재능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알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영혼의 소유자로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고 싶어 했다. 일에 대한 욕심이 없어 오히려 행복하다고 끝없이 믿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즐기며 묵묵히 걸어가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삶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한 나로 살아가려면 누군가로부터 분명한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게 바로 크놀프였다. 그의 독특한 영혼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면서 일요일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예전 같으면 일요일은 주중에 방전된 몸을 재충전하는 휴식 같은 날이 전부였다. 일요일은 아무런 느낌은 없는 단어일 뿐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그의 치열한 고민을 알게 되면서 일요일의 진짜 의미를 배웠다. 일요일은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는 ‘삶의 의미’였다.
크놀프와 나는 외로운 사람끼리 만났다. 서로에게 외로움은 불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았다. 그는 다른 외로운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외로움의 정수 같았다. 나에게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고 싶다고 가르쳐준 것도, 자신의 천성(天性)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알려준 것도, 자기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겸손하게 말해준 것도 그였다. 내게 있어 그의 삶은 옳았다.
그래서 책방아지트는 일요일에도 문을 열고 있다. 하루하루는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일요일이다. 일요일이라고 해서 다른 요일하고 별반 다르지 않는데 문을 닫을 까닭이 없다. 책방아지트의 문을 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느 때고 찾아와도 즐거운 이어야 한다. 그러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빈틈없이 더 많이 일을 하고, 더 많이 돈을 벌려고 할수록 책방아지트의 아름다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사는 일, 그것은 생각보다 더 아름다운 특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