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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우아 Sep 25. 2024

신성한 노동

누구나 한 번쯤 마음의 모서리에서 현실적인 적(適)을 만난다. 그 현실적인 적과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적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 같다고 하면 캄캄하고 광활한 미로에서 빠져나올 방도를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어둠이라고 해도 우리는 기어이 완벽한 어둠에 적응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인생은 바쁜 사람들의 천국이다. 그러다 보니 바쁘고 고된 하루는 뭔가를 소유하지 못한 열등감으로 나타났다. 바쁨을 최선으로 여기며 먹고 살만큼의 돈을 버는 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란스러운 질투가 점점 더 인생을 지옥 속으로 빠뜨렸으니까.


사람들은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닌가? 체념하듯 살아간다. 어쩌면 밥그릇을 단단히 붙들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듯하다. 텅 빈 밥그릇을 볼 때마다 이토록 엉망진창인 삶을 정리하고 싶었고, 남에게 도움을 받으면서도 정작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어도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초라해져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지금까지 재밌는 여행을 제대로 떠나지 못한 것도, 별다른 취미가 없는 것도 결국 돈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나는 돈보다 헛된 희망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헛된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으니 내 인생이 헛것이 되어버렸다고 하면 굳이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미래가 불안하다는 애정이 담긴 쓴소리를 들어도 웬만해서는 끄떡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면역력이 생겼으니까. 내가 진즉에 헛된 희망을 버리고 남들처럼 현실적인 감각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다. 헛된 희망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일찍이 프랑스의 비평가 에밀 파게는 말했다. “독서의 적은 인생 그 자체다. 삶은 질투와 경쟁으로 뒤흔들리고, 우리를 독서를 통한 자기 성찰에서 멀어지게 한다.” 나는 삶의 질투와 경쟁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려 이제는 마음도 몸도 마른 풀잎이 되어 서걱거렸다. 바람에 실려 언제 날아갈 지 모를 괴로움을 참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방법은 딱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책으로 성벽을 쌓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인생의 적은 책 그 자체”였다. 나는 책이라는 물성(物性)을 좋아했다.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들이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내가 몰랐던 글자와 마주칠 때마다 어김없이 밑줄 긋는 상상 이상의 다정함이 생겼다. 책은 내가 몰랐던 감정의 변화를 가져다준 사랑이었다. 나는 책을 버리지 못했다. 아니, 버릴 수 없었다. 

 

책에 대한 사랑은 두 가지였다. 성공을 확신하는 자기 계발을 이야기하는 무수한 책들을 사랑하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희망이었다. 두고두고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멀리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간절히 바라는 사랑, 때로는 오해해도 좋으니 도끼 같은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무언가를 더 알고 싶고, 기억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헛된 희망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 있다. 책은 불행을 해결해주지 않았지만 불행을 잊어버리게 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버티는 힘이 없어 절망했던 순간에도 어김없이 책 속에 빠져들어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책은 혹독한 인생이라는 적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고행이었다. 어떤 슬픔 속에서도 불행에 대해 부단히 싸우는 대신 책으로 마음을 꾹꾹 눌렀다. 독서는 일종의 생존수영이었다. 최대한 몸의 힘을 빼야 하는 ‘잎새 뜨기’이었다.


그 시절, 오로지 독서하는 일 이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의미가 없었다. 그것이 유일한 삶의 노동였다. 독서는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절실한 노동이다. 독서의 노동은 삶의 열망과 닮아 있다. 독서에 대한 열망은 나 자신의 고유한 모습에 대한 열망이었다. 나 자신을 위한 독서, 나를 매혹시키는 독서, 나의 내공을 기르는 독서는 ‘신성한 노동’이다. 때로는 온 몸을 던져버리는 사랑 같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에 나오는 다이스케는 겉으로 보면 부잣집 아들의 당연한 권리를 누리면서 빈둥빈둥 지내는 듯 했다. 그는 직업에 관련된 경험을 싫어한 냉소주의자이다. 남들 눈에 그가 좋게 여겨질 리 없다. 보통 사람들은 생활이 어렵다고 하면 직업적인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결코 빈둥거리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그는 자신이 절실하게 직업에 매달리는 불쌍한 노동보다는 ‘신성한 노동’을 추구했다. 얼핏 보면 자기변명으로 들리는 고상한 경험이 적어도 나에게는 끝없는 자기반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삶이 노동이라고 했을 때 우리 모두에게 신성한 노동이 필요하다. 다이스케처럼 귀족의 신분이기 때문에 신성한 노동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신성한 노동은 우리 모두가 노동의 주인공이 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먹고사는 노동, 즉 생활의 노동에 만족하면 삶이 한결 편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목표도 권리도 없는 ‘타락한 노동’이다.


돌이켜보면, 독서는 신성한 노동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가치를 찾는 진실이었다.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려면 신성한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이 신성한 노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보통의 존재에 불과하며 때로는 그보다 더 무료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사실 신성한 노동은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세상이 만든 노동으로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든 노동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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