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종종 내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본다. 내가 아이 일과를 생각했던 것처럼 아이도하루종일 있었을 나의일이궁금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난감하고 조심스럽다. 그건 주위에서 벌어지는 절망적인 사건에 대해, 피카레스크 소설에 나올 법한 악당과 폭력적인 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까닭이다. 동화 속 이야기와 달리 현실에선 착하거나 약한 자가 슬플 때가 훨씬 많고,자주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다는 걸 말이다.
지금 나는 타인의 불행을 처리한다.
어릴 적 내게 꿈이 무엇이냐고 주변에서 물었을 때,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보통 그런 질문은 되고 싶은 캐리어에 대한것이지만, 나는 특정한 직업을 염두에 두며 꿈을 꾸진 않았다. 사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학창 시절을 막연하게 보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무엇이 되었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엔 변함없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해진다면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행복은 단순히 텃밭에 모종을 심고 잡풀을 솎아주면 되는 것이라 여겼다. 물과 영양분을 공급하고 적당히 햇빛을 쬐면 자연스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박한 나의 기대와 달리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식물이 자라는 데에는 습도, 광도, 바람, 토질 등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많았고, 어느 하나도 허투룰 수 없었다. 식물이 생육하기 위해선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행복이란 것도 그랬다.
누군갈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발상은 유치했다. 어쩌면 교만했던 것인지 모른다. 살다 보면 나 자신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주관적이고 난해한 행복이란 감정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거나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알기까지 상당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남을 덜 불행케 만드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알 수 없는 원인이나 정체의 등장으로 쉽게 요동쳤던 것 같다. 불안, 좌절, 죽음 등 불행을 나타내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고, 그것들이 현실을어떤 식으로 정의할 때마다커다란 미로가 하나씩세워졌다. 우리는 그런 미로 속에서 실험실 쥐처럼 허우적거리며 사경을 헤맸다.이런 난처한 상황을 조금 어려운 말로 ‘카프카에스크(Kafkaesque)’라고 한다. 카프카(Kafka) 이름에서 딴 형용사, ‘카프카에스크’는 실존적 상실, 비인간화, 부조리성을 상징한다. 마치 머물 곳을 찾지 못해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라는 뜻일 테다.
나는 그런 절망적 상황을 '유감'이라 생각한다. 처한 환경과 여건에 따라 유감이란 단어는 다의적으로 해석되지만, 대개는 우리에게 복잡함, 안타까움, 서운함, 불편함 등 익숙한 감정들이다. 또한 유감은 죽은 망자를 향한 애석함이나 그리움을 뜻하기도 한다. 유감으로 인해 일상이 기울어진 시소처럼 한쪽으로 추락할 때, 하늘을 날기 위해 반대쪽이 솟구쳤던 건 아니다. 양쪽 모두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시소였고,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유감이란 것도 일상의 일부분으로 당연히 끌어당겨야 할지 모른다.
카프카는 유감적인 상황을 기꺼이 자기 곁으로 끌어들였다.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았던 부조리한 현실을 목전에 둠으로써,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블랙 코미디를 완성하려던 건 아니었을까. 왠지 슬프지만 우습고 웃기지만 암울한 모습들을 과감히 이야기하면서. 몸과 마음으로부터 파편들이 떨어졌을 때 떨어진 빈틈을 또 다른 조각들을 꿰맞췄다. 그리고 거기엔 모순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 나는 카프카의 글을 읽으며그의새로운 존재가 흥미로웠다.
카프카는 현실을 아주 섬세하고 치열하게 이야기했지만, 넝쿨 같은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전체가 구부러져 무엇을 읽었는지 조차 잊게 된다. 문학, 철학, 신학, 심리학으로 그를 이해하는 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그것은 그를 낯설고 별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나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다만, 나는 카프카가 느꼈던 절망, 상실, 고독, 불안 같은 것들이 가까운 현실에서 일어났으며,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경험했거나 앞으로 경험할 일들이다.
유감은 마치 무한화서처럼 아래서 위로, 가장자리에서 가운데로 천천히 줄기를 올린다. 줄기 끝에 끊임없이 매달고자 한 것은 어떤 물음일 것이다. 유감인 상황은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아슴거리지만, 실상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것. 유감으로 인해 일상이 조작되거나 저장된 기억조차 왜곡된다. 그리고 우리 모습은 조작이나 왜곡을 통해 본래의 형태와 달리 변신하기도 했다. 그것은 유감에 적응하기 위한 본능일 것이다.
이 글은 내가 무슨 일을 했었고,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나중에라도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고 나서, 과거카프카나 현재 나처럼 유감스러운 처지에 발을 담글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아찔했다. 어쩌면 주체이자 객체로서 또는 관찰자로서, 울고 있는 까마귀에게 해명을 요구할는지 모른다. 무엇이 이토록 유감스럽게 하는지에 대해.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나, 동전을 던졌을 때 불행의 면이 먼저 보일 확률이 훨씬 큰다는 걸 예감한다. 그럼에도 불행에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운명으로 치부하지 않고 끝까지 격렬하게 싸우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