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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프란츠 May 05. 2024

K들

워커스를 만나다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은 결국 생을 관통하여 이르는 죽음 앞에 멈추어 선다. 죽음은 생의 바깥에 존재하므로, 자신이 경험했던 죽음조차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야말로 죽음을 삶의 넌센스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의 찰나, 생의 빛을 소실하고 어스름한 구멍에 빠져버린다.


어떤 사람은 필연적인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두려워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자연 현상의 하나담담히 받아들인다. 대부분 사람들은 전자에 해당할 테고, 그런 죽음을 삶의 종말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후 세계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려는 뜻과는 상관없이, 삶의 끝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생각과 감정일 것이다.   


카프카 작품 속에 주인공들은 정말로 다양한 직업가지고 있다. 그들은 의사, 예술인, 광부, 영업사원, 점원, 자영업자, 측량사, 선원, 건설잡부, 보조원, 경비원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종국에 가서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거나, 불투명하지만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풍경 속에 사라졌다.


그런 죽음의 결말을 두고 혹자는 죽음만이 현실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거나, 관계의 갈등을 화해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는 외부의 부정한 권력이나 부패한 권위에 맞선 자기 안으로의 투쟁이거나, 자기 영혼에 대한 구원으로 해석한다. 즉, 카프카의 작품 속 죽음들은 현실에서 마구 뒤엉킨, 삶의 실타래를 풀어주는 궁극의 열쇠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주인공들이 선택한 죽음 일명 품위 있는 결단으로, 고귀한 자유의지 등으로 포장한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그런 상징 메타포를 강조한다면, 죽음은 개인의 아주 사소하고 개별적인 일로 치환될 것이다. 난데없이 일어난 죽음의 충동은 현상일 테고, 스스로 구원에 이른 그들의 죽음을 누구도 애석하지 않을 것이다.




카프카는 평생을 체코 프라하에 살았다. 체코는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출범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편입되었다. 당시 유럽 대부분 지역이 목재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했지만, 체코는 풍부한 석탄 자원을 원료로 사용하며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루었다. 체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회사 중 하나인 스코다(SKODA) 등을 중심으로 중공업과 군수산업 등 세계적인 공업단지를 조성한 상태였다.


산업의 눈부신 발전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노동자들은 공장들이 밀집된 도시로 몰려들었다. 노동자의 급격한 증가 도시빈민, 노동착취, 산업재해라는 사회적 문제 대두되었고,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은 기존 권력층뿐만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인 자본가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결국 독일제국의 비스마르크는 정치적 목적에서 최초로 사회복지법을 제정하였고, 그 영향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도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산업재해보험공사(또는 노동자재해보험공사)라는 공공기관 설립하였다.  


카프카는 프라하대학교의 법학부를 졸업한 후, 1908년 7월부터 1922년 7월까지 14년간 산업재해보험공사에 다니면서, 40세인 1924년 6월 3일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산업재해와 연관된 법률문제, 산재예방정책, 유족보상 등 업무를 수행했다. 그가 재직할 당시 전시동요법 시행, 1차 세계대전 발발 등 큼지막한 사건으로 인해 노동의 효율성과 경제성이 강조되었고, 노동자의 삶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카프카는 <선고>, <변신>, <화부>, <성> 등 주요  작품들을 썼고, 3번 약혼과 파혼을 했다.


카프카 일하는 동안 급격히 진보를 이룬 기술과 문명을, 이를 제때 누리지 못하는 워커스(Workers,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일하는 자들)를 직접 목격하였다. 자신도 독일인이나 체코인이 아닌 유대인으로서,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게 워커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만난 워커스는 무거운 기계처럼 작동되 수리되었지만, 정상적인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엔 쉽게 폐기되었다.



만약 카프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런 류의 글쓰기를 굉장히 망설였을 것이다. 일하면서 접했던 워커스의 삶과 죽음들은 하나 같이 충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내 가슴속 한 켠에 터진 풍선조각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러다 우연히 카프카의 글을 접하면서 일종의 동질감과 위안을 느꼈다. 물론 그의 글들은 무척 까다롭고 낯설었던 게 사실이었지만, 어느 날 문뜩 비현실적이기만 했던 글에서 엄청난 리얼리티를 맛보았다. 리얼리티는 기시감(感)처럼 무관심, 체념, 죽음, 독백으로 이어지는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나는 법학 전공 프카와 같이 사람의 사고, 질병,  등에 관한 문제 오랫동안 다루다. 아마도 카프카로부터 받은 동질감이나 위안의 감정은 비슷한 배경과 경험 때문일지 모른다. 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워커스의 유감스러운 현실을 직접 목격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카프카를 먼저 소개하는 이유이다.


카프카가 자신의 주인공들을 종종 'K'라고 불렀던 것처럼, 내가 만났던 워커스의 이름을 모두 'K'라고 할 것이다. 이름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유감적인 삶과 죽음 겪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면, 동일한 삶과 죽음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꺼이 나는 그들 곁에 있고 싶다. 위로의 눈물이 그들을 더 행복지게 하리라는 확신은 없어도, 조금이나마 그들이 덜 불행해지도록 기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 사진출처: COPILOT DES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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