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로 먼지 낀 남자의 목소리가 새끼들을 불렀다. 새끼,라고 남자가 부를 때마다 연쇄반응처럼 새끼들이 늘어났다. 그것들은 보드라운 털을 가졌고 작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컹컹 짖었다. 남자도 크게 짖었던 것 같다. 남자는 강아지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견주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왜, 수술한 걸 인정하지 않는 건데? XX야!"
"저, 누구십니까?"
"개 XX, 다 알면서 물어. 너도 같은 XX네."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장난하냐, 몬 말이지 몰라서 그래? 개 XX."
60대로 추정되는 정체 모를 남자가 다짜고짜 내게 화를 냈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분노를 터뜨릴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남자의 잇새로 낡은 숨이 거칠게 삐져나왔다. 차마 입에 담질 못한 말들이 튕겨졌다. 귓가에 들러붙은 우렁찬 매미 소리에 정신이 아찔했다.
초식동물은 갑작스레 공격을 당하면 쉽게 무기력해진다. 기운이 빠진 초식동물은 먼저 목덜미를 물리고 곧바로 포식자의 든든한 먹잇감이 된다. 내게 득달같이 달려들던 남자를 납득할 수 없었다. 전후사정없이 새끼를 부르는 소리에 뜬금없이 먹잇감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전화기줄을 내 목에 걸어 질질 끌고 갈 것만 같았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어떤 강아지를 찾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나는 남자가 찾던 새끼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말들이 롤러코스터처럼 내게 질주했고 그대로뚫고 지나갔다.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질퍽해졌다. 순간 굴욕감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었다. 어떤 식의 대화도 더 이상 의미 없어 보였다. 딸칵, 뜨거워진 수화기를 내렸다. 이유가 어떻든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가끔씩 그렇게 개라고 불린다. 카프카가 알고 있는 여러 종의 개들 중 나와 같은 게 있을지 모르겠다. 카프카의 개 중에는 아주 놀라운 직업을 가진 개가 있었다. 그것은 일명 '공중견'으로 불렸다. 공중견은 겉에서 볼 때에 매우 빈약하고 발육상태가 좋질 않았다. 늘 공중에 부양한 상태로 떠 있기에 눈에 잘 띄지도 않았고, 조용히 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누구나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공중견은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연구하는 개에 따르면, 공중견은 아주 활발히 움직였다고 한다. 그것은 쉴 새 없이 공중에서 어떤 노동을 수행 중이었다고 한다. 연구하는 개는 먹고사는 문제에 관해 연구해 왔는데, 공중견 역시 일반적인 개들과 마찬가지로 땅에서 나는 산물에 의존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공중견이 불편한 공중 생활을 하는 이유에 대해선 침묵했다.
그러한 침묵 속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말 알기 어렵다. 무언갈 표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실제 세상에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두렵거나 불안한 걸 숨기기 위해 침묵하기도 한다. 또는 침묵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침묵하는 자만이 알 테다.
"어두운 밤, 골목길에 낯선 사람들이 뛰어가더라도 모른 척했지. 어떤 영문인지 모르니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게 좋겠다고, 어쩌면 내가 당할 수도 있으니 괜히 복잡한 상황에 휘말리지 말자고 생각했어. 나는 이미 피곤하고 지쳤으니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으니까." 카프카는 사람들의 침묵을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든 심야시간, 온라인으로 주문된 물건들이 보관된 창고 선반에서 빠져나와 포장되고 분류되어 소비자의 집 앞까지 배송된다. 이를 '풀필먼트 서비스(FulfillmentService)'라고 한다. 기술개발과 알고리즘으로 물류혁신이 이뤄진 덕분에 소비자들은 편리해졌다. 이런 서비스가 이뤄지기 위해 수많은 '보이지 않는 노동'이 개입되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물류혁신으로 더 이상 기술 노동자는 설 자리를 잃었다. 알고리즘이 인간의 기술을 대체했기 때문이다.알고리즘이 단순 노동자들을 계속 양산하는 동안노동자는 낮은 임금과 고용 불안에 처하게 되었다. 알고리즘이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킨 듯했지만, 노동과 인간 모두를 지배한 셈이다.
얼마 전 택배기사 K의 유족급여가 신청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K는 1년 2개월간 새벽배송 업무를 하면서 일주 평균 78시간 이상을 일했다고 한다. 지난 5월 K가 심실세동과 심근경색으로 숨지기 직전, 배송업무를 마감하기 위해 "개처럼 뛰는 중"이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과연 무엇이 택배기사 K를 개처럼 뛰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K와 같은 택배기사들의 재해가 늘어만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총알보다 빠른 로켓이 되기 위해 택배기사는 매일 늦은 저녁과 새벽을 발을 동동거리며 뛰어간다. 아니다, 그들은 거의 무중력 상태로 공중을 떠다니고 있다. 마치 공중견처럼 말이다. 그들은 워커스(Workers)지만 야간노동과 장기노동을 제한하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사업소득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원하는 만큼 운송할 자유가 있다,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K 외에도 지난 7월 폭우 속에 일일배송하던 40대가 급류에 쓸려 숨졌고, 물류센터에서 분류작업을 하던 50대가 심정지로 사망하는 등 풀필먼트 서비스에 종사한 많은 이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매년 그곳에서 다치거나 죽는 숫자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한다고 해서 개같이 죽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나 자신도 개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택배기사 K도 개같이 일하길 원치 않았을 테다.
오늘의 알고리즘과 소비문화는 워커스의 자유를 연약하고 빈약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본과 소비를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침묵한다. 마치 관행처럼 침묵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로써 보이지 않는 노동 문제와 구조적 위험은 점차 간과된다. 아무도 물류 노동자의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장기간 공중으로 뛰어다녔던 K의 일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기예일 뿐이다.
모두가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존재여서 인간답게 살아가길 나는 소망한다. 노동의 족쇄나 그로부터 야기된 목줄에 꿰어 개같이 끌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개가 되지 않기 위해선 침묵의 충동과 관행을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호모 카니스가 아니니까 말이다.
* 카프카의 <어느 개의 연구> 참조
* 카프카의 <뛰어 지나가는 사람> 문구 중 일부 인용
* 호모 카니스(homo cănis): 카니스는 라틴어로 개라는 뜻이다. 즉, 개와 같은 삶을 산다는 뜻으로 작가가 만든 조어임.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