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모를 터널 같은 데 갇혀 막막함을 호소했던 적이 있다. 캄캄한 틈새로설핏한빛줄기가 새어들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과연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언제쯤 정의(正義)란 게 구현되는지 신에게 묻고 싶었다. 미적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당신의 기적과 구원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누군가 갑자기 사라지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도 그럴까 두렵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사라지거나 지워지려고 한다. 금방 파도에 쓸려갈 줄 알면서도 모래 위에 이름을 새겼던 건, 사실 지워지지 않고 계속 기억에 남으려고 애썼던 흔적이다.
얼마 전 택시기사 K의 산재가 승인되었다. K는 택시회사가 여객운수법을 어기고 사납금제를 강요하는 데에 반발하다가 사측이 휘두른 주먹에 맞았고, 이후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결국 해고되었다. K는 완전 월급제 시행과 체불임금 지급을 촉구하며 분신한 뒤 사망했다. 정부는 회사의 최저임금법 위반 등을 적발했고, 지자체는 여객운수법 위반에 대한 사전처분 명령을 내렸다. 또한 회사 관계자는 특수협박 등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K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무력감, 모욕감, 두려움을 느꼈고,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면서주변 상황을 도저히 분별할 수 없는 터널상태에서분신했다. K의 이야기는 과거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다가 분신한 청년 전태일을 떠올리게 했다. 전태일은 1970년 11월 어린 시다들의 폐질환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키 위해 근로기준법 준수를 촉구하다 21살 나이에꽃잎처럼 산화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호소는 시민의식을 깨웠고 노동운동에 불을 지폈다. "더 이상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울부짖음에 야멸찬 시대가 뒤늦게 응답했다.
불의와 악습으로 채워진 곳에서 일개의 정의는 무엇일까, 그런 정의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영화나 소설에선 선한 영웅이 악당을 쉽게 물리치고 정의로운 세계를 굳게 지켰다. 선과 악이 명확하지 않은 곳에서도 선은 최후까지 남아있는 인명 구조용 보트처럼 존재하지만, 종종 현실에선 정의로운 삶이 도리어 큰 손해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마치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던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산에 쇠사슬로 묶였던 것처럼 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지키려다가 자신의 간을 독수리에게 내주는 형벌을 받았다. 카프카는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 부리에 고통스러워 바위 속으로 들어갔고 덩그렇게 바위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수천 년이 지나자 아무도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로지 남은 건 고독해 보이는 바위산뿐이라고. 비록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지만, 인간은 그보다 제우스를 더 추앙하는 것을 보면 기실 인간은 친절한 자보다 자신에게 재앙을 일으켰던 폭군을 더 선호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바위산은 아스라이전설이 되었다. 전설은 우리 곁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분명 어떤 진리와 정의(正義)로부터 유래된 것이었지만, 긴 세월을 거쳐 본래의 기원이 까마득해진다. 뚜렷한 이유 모를 정의가 상비약처럼 일상의 공간 어딘가에 비치되어 있다. 어디에 놓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면서 위태로울 때 긴요하게 쓰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알베르 까뮈의 글에서 카프카가 말하고 싶었던 정의를 대신 읽은 것 같았다.
"인간은 여전히 프로메테우스의 절규에 귀 막고 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구하려 했고 이미 고통받을 운명인 줄 알면서도 단행했다. 그리고 찾아온 자신의 고통을 감내키로 한 것이다."
사람들은 정의를 배척했지만 아직도 정의는 이어져 온다. 그것은 부조리 앞에 눈 감을 수 없는 자들이 스스로 횃불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바위처럼 굳어진 정의는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보이지 않을 뿐이어서, 그들은 고통인 줄 알면서도 정의를 따랐던 것이다. 그래서 전설이었던 불은 현실 속에 살아남아 존재할 수 있는 것일 테다.
* 카프카 <프로메테우스> 참조
* 알베르 까뮈 <여름>에서 일부 인용
* 2024. 8. 19.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택시기사 완전 월급제의 전국 확대 시행을 하루 앞두고 2년 유예키로 결정했다. 다만, 이미 월급제가 시행 중인 서울은 그대로 유지키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