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씨앗이 촉촉한 땅에 발아하여 심지를 키운다. 연한 심지는 단단한 덩굴줄기로 성장하고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선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런 욕망을 계속해서 무언갈 만들어내는 생산적 힘이라 말했다. 그리고 욕망은 스스로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고 했다. 욕망은 끊임없이 나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낯선 환경에 적응케 만든다.
욕망을 품은 인간은 늘 정신없이움직인다. 마치 치즈 조각을 찾아 뛰어다니는 생쥐 같다. (그렇다고 생쥐가 치즈를 꼭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는 바쁜 인간에게 풍부한 먹이와 자유로운 공간을 주었다. 생쥐는 광활한 광장을 맘껏 뛰어다닐 수 있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래서 거칠 것 없는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하지만 울타리 같았던 벽들은 조금씩 높아지고 안으로 조여들었다. 날마다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걸 느낀 생쥐는 뒤늦게 탈출을 감행했지만 출구는 없었다.
우리는 실험실이나 무균실처럼 통제된 공간 속에 갇혀 사육되고 있는지 모른다. 가축처럼 길러진 우리는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처럼 분주히 움직이지만 새로이 다다를 곳은 없다. 온통 사방은 자본의 철저한 벽에 가로막혀 있는 까닭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고양이같이 사나운 것이 뒤쫓지 않았다면 우리는 출구 없는 현실을 간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석 빼기에 죽음의 덫이 놓여있다는 걸 모르고 계속 행복하다 했을 것이다.
사나운 것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정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벽 뒤에 몰래 숨어있던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누군가 우리의 욕망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카프카는 인간을 넘어선 또 다른 욕망의 존재를, 그리고 그것이 삼키려 했던 우리 삶을 관찰하고 있었다.
하인리히의 법칙란 게 있다. 큰 재앙이 발생하기 전 이미 그곳에선 작은 재해들이 있었고, 다행히 사고를 피하긴 했으나 같은 원인으로 다칠 뻔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사소한 사고의 원인이나 오류를 밝혀 대처하지 않으면 결국 큰 사고가 터지고야 만다는 것이다. 큰 사고가 터질 가능성은 0.3%, 확률적으로 재수가 없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건 결코 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전에 숱하게 벌어졌던 공장 내 안전사고 대부분은 제조 노동자의 부주의한 탓으로 돌렸다. 생산 메커니즘은 안전진단을 통해 결점이나 흠결이 없어야 했다. 다만, 정해진 매뉴얼을 따르지 않은 노동자의 개별 행동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여전히 공장기계는 뜨거운 열기를 쉼 없이 뿜으며 돌아가야 했다. 기계가 돌아가는 시간만큼 자본이 축적되기 때문이다. 생산 벨트의 속도를 높일수록 이윤이 늘어나는 구조 속에서 기계만은 온전한 것이다.
K는 혼자서 제빵기계 사이를 오가며 추가된 할당량을 채우고 있었다. 다음 순번 근무자가 교대할 때까지 소스 배합을 마치지 못할까 걱정하며 배합기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늘어난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생산 속도를 줄이거나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K는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기계는 작동을 멈추지 않았다. 시정명령이 떨어지고서야 기계는 굉음 소리를 중단했다.
절대로 지칠 줄 모르는 기계들 사이에 내몰린 노동자는 나약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자본은 노동자가 계속해서 기계와 함께 질주할 것인지 말 것인지 강요한다.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는 극한 선택은 노동자의 삶과 품위를 전멸시킨다. 그러나 자본은 본래 사나운 모습을 숨기고 행복하게 빵을 굽는다. 정작 제조 노동자는 슬픔과 절망에 반죽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렇게 반죽된 노동자의 보상 문제를 처리하는 기계일지도 모르겠다.
* 카프카의 <작은 우화> 참조
* 사진출처; COPILOT DESIGNER
* 욕망하는 기계: 질 들뢰즈는 욕망을 운동성으로 바라봄으로써 욕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힘으로 개념화시켰다. 그리고 욕망은 작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해낸다는 점에서 기계와 같다. 따라서 욕망을 원초적 힘이나 에너지, 역동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문한다.(나무위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