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체감했던 신체적 고통 가운데큰 것을 말하라면 라섹 후 통증을 꼽을 수 있다. 시력교정수술 후수십 개의 날카로운 바늘들이 눈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거의 사흘간 눈 뜨지 못 한 채 침대 위에서신음할 수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때의 고통이 일시적인 게 아니었다면과연 나는 감당할 수 있었을까?' 란 물음은 죽을 때까지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절망했던 어떤 늙은 사람의 이야기에 자연스레관심을 가지게 했다.
카프카의 시골사람은 평생 희망고문 속에 살았다. 문지기에게 법(法)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졸랐지만,출입을 담당했던문지기는 번번이 거절했다.빛나는 문은 열려있었지만,문지기의 엄포가 두려웠던 그는 감히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법 앞에 호소하고 싶은 게 있었을 텐데도 그는 매번 문 앞에 멈췄다. 결국 그가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오그라들어서야 문지기가 그에게 말했다.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지.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겠어."
허무하게 끝나버린 결말에서 나는 냉정한 문지기의 모습이 나와 같다고 생각했다. 원했던 건 아니지만 그게 세상에 비친 내 모습일 것만 같았다. 카프카는 자신의 산재 업무를 빗대어법을 지키는 문지기로설명하려 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아니라, 단지 문지기 이상의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 불편한현실을 비틀고 싶었을 것이다.
K는 퇴근하던 중 버스와 충돌하여 고관절이 부러졌다. 사고 직후 골절 수술이 가능했지만 수술 없이 보존적 치료를 선택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뼈가 붙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고관절 부위 통증으로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K는 주치의로부터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complex regional pain syndrome) 진단을 받았다.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의 65% 이상은 외상 후 발생한다. 외상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경우에도 극심한 통증에 시달릴 수 있다. 그것은 자율신경계의 다양한 증상을 동반하고, 추위, 습도 등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나의 치료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거의 평생 동안 통증을 안고 살아야 하는 무서운 질환이다. 단순히 교통사고로만 생각했던 일은 K의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리고 회복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K는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의 인정기준인 4개 증상(감각이상, 혈관이상, 발한이상, 운동이상) 모두를 호소했지만, 골스캔과 근전도 검사 등을 통해 겨우 1개 징후만 확인되었다. 따라서 K는 추가로 신청했던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나는 K에게 유감스럽다는 말과 함께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의 진단기준과 불승인 사유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K는 크게 낙담했다.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유감표시가 무슨 소용이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더 이상 치료를 받을 수 없게 되자 K의 절망은드라이아이스처럼 차갑게 끓었고, 시선은 경멸로 가득했다.
사람은절망적이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기적이라는 희망을 꿈꾼다.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고서야 겨우 살아갈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엔 차라리 아무 희망도 갖지 않고 체념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불씨 같은 희망 때문에 계속 고통 속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하면서 언제나 법과 원칙을 강조했다. 법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실현케 하는 도구니까, 강제적이고 강력한규범으로서법은 인간의 신념, 가치, 공익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다양한 경험이 녹아 있는 사회적 계약이어서 절대 불멸의 법칙이거나 이치는 아니다. 즉,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그럼에도 법이일단 세워지면 권위를 갖고 모든 것을 원칙에 따라 판단한다. 정녕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정의라해도 엄청난 힘을 갖는다.
어떤 사람들은 문지기의 위협에도 시골사람은 자기 뜻을 실행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실천 의지가 부족해서 법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은 그의 불찰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의지가 있다고 해서 통과할 수 있었던 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커다란문지기가 이런저런 조건과 절차를 들먹이며 그를 시험했을 것이고, 그는 수많은 테스트를 통해 지쳤을 것이다.
법으로 들어갈 사람이 반드시 실천가이거나 혁명가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법의 문턱을 넘는 방법을 혼자서만 고민할 것도 아니다. 모두가 법적 정의와 공정성에 대해함께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법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이 너무 비좁고 문턱이 높다면 어떻게 낮출 수 있을지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나 역시 워커스의 신음으로 감정이 흔들릴 때가 많고, 깐깐한 문지기로서 역할과 책임에 한계를 느끼곤 한다. 문지기는 워커스를 단순히 심판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을 살피고 그들의 고통을 기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눈과 귀를 늘 열어놓고 그들이 법의문턱에서 멈추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도우는 일이 소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의 사정은 내 생각과 사뭇 달랐다. 폭주하는 서류를 처리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규정되지 않은 일이라는 핑계를 대며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K에게 감히 꺼낼 수없었다. "날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날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