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 5분 전,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냉방장치가작동하지 않는사무실은 찜통속이다. 온도계수은주는 섭씨 31도능선을정복했고, 나는 가망 없이 손을 흔들었다. 서서히 달궈지는 냄비 속개구리를 상상하고 있을 때, 캄캄한 실내에 조명이 환히켜졌다. 잠시 카페로 피서를 떠났던직원들이 플라스틱 얼음컵을 들고 복귀했다.호두까기 인형처럼 생긴 직원이 둥근 얼음을 우두득 씹어 먹었다.
주위를 둘러싼 유리창문은 사무실 안팎의 영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다. 얼음처럼 투명한 유리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각종 소음과 먼지를 막아냈다.나는 유리 속에 살면서 외부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다. 다만, 어떤 특별한 일들은 보고서처럼책상 위에 올라가,실제로 일어났던 불행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홀로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불쑥 마주친미친개에 대한 이야기처럼 놀랍기만 했다.
우리는 때때로 단단한콘크리트 더미에 갇힌 채 자유와 해방을 갈구한다. 야생에서 구원된 자는어떤위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자신한다. 그리고명확한 증거 없이일상의평온이 지속되리라 믿는다. 그것은 정육점에 진열된고기처럼 진공포장되어 빈틈없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쉽게 불행을 맞곤 한다.
불행한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난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아요.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들은 불행이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발생하였고, 타당한 이유없이 온전한 삶을 나락으로 빠뜨렸다주장했다. 누군가 재수 없이 걸린 개미지옥은 절망의 구렁텅이였다.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을 때, 숨 쉬던 공기는 무겁게 변했다.강한 돌풍이 불어와살려달라외쳤지만, 답답한 숨이 목구멍을 조였다. 제발 그곳을 벗어날 수 있게해 달라고 그들은 기도했다.
얼마전 김용균 감독의 <소풍>이란 영화를 보았다. 70대주인공들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각기 다른 삶을 살다가 다시 고향에서 만났다. 꽃들이 이울고 바람이 가멸찬삶의 끝에서,주인공들은 무엇을 남기고 떠날지 고민했다. 그들은 이제껏 성실히 살았으나 제대로 자신을 돌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파킨슨병이나하지마비 증세는예상치 못했던부자연스러운현상이었다.스스로 돌볼 수 없었던그들에게 중요한 일은 무엇을 남기는 게 아니었다.
카프카에게도 삶은 매우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었으나, 늘 슬픔과고통이뒤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좌절이나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모든 게 정말 끝장이 난 듯해도 결국은 새로운 희망이 생기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는불행을 못 본 척하는 현실과상관없이소풍을 떠났다. 멋진 옷을 차려입고 옆사람과 팔짱을 끼고 산으로 올랐다.서로틈이 벌어져 있어도, 삶은 본래 견고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괜찮았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우리 삶은 쉼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쉼표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인생의 항로를 결정지을 수 있다. 쉼이 있는 시간은들숨과 날숨으로 일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일상은 긴밀하고 느슨한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삶이 있는 이 세상이 아직도 아름답다 생각한다. 가꾸지도 않아도 정갈하고,소박해도 뜻밖의 안식과 평온을 느낄 수 있고, 한 줌 햇살만으로도찬란한 곳이 있기에,가는 길에기쁨이 아슴거린다. 소풍을 가다가 수천 년 간 방치된 돌멩이로 탑 쌓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언갈 소망할 수 있다.
여행이 스스로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라면, 소풍은 익숙한 세계를 낯설고 새롭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여행을 위해선 준비할 것이 많지만, 소풍을 떠날 때엔 같이 나눌 도시락만 있어도 충분하다. 여행은 고통(travail)을 동반하지만, 소풍은 일상의 해방과 기쁨을 선사한다. 그래서 나는 일상의 절망을 날리고 빈틈을 행복으로 채우기 위해 소풍을 간다.
소풍에 나섰다가 예고 없이 비가 내리면 그대로 맞는 것이다.절망과 슬픔도 함께 씻겨질것이기에,내 곁에 소중한 사람이같이 있는 소풍이라면 언제든떠나자. 타고르의 <기도>처럼,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 스스로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는 게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