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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프란츠 May 16. 2024

행복한 도약

회랑 관람석에서

내가 어릴 적 전국방방 곳곳을 돌며 유랑하는 서커스단이 있었다. 마을을 돌며 서커스 단원이 행진을 벌이면, 아이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만난 것처럼 호기심에 끌려 쫓아다녔다. 단원들이 접시 돌리기, 외줄 타기, 저글링 등 묘기를 끝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 서커스단에는 늘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소인과 미소 짓게 만드는 아름다운 소녀들이 있었다.


카프카가 보았던 곡마사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짙은 화장과 화려한 치장으로 아픈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서커스 단장이 채찍을 휘둘러 그녀와 말을 쉼 없이 달리도록 다그치면, 쓰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곧추 세웠다. 그녀는 관중의 박수와 갈채를 유도하기 위해 공중도약을 강요받았다. 아니다, 사실은 그러한 감정이 그녀 스스로 솟구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객석에 앉은 한 카프카는 아득한 꿈에 잠겨,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지친 이 분명한데도 공중도약을 애쓰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곧이어 그녀의 몸뚱이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본래부터 날개 없는 것이 비상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과연 찬란한 일인지, 그런 모습을 보고 고무되어 경의를 표하는 게 맞는 일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상의 <날개> 주인공인 '나' 역시 날개가 없는 존재였다. 나는 햇빛도 들지 않는 캄캄한 방에 갇혀 무기력했다. 앙상한 몸에는 날개 깃털이 될만한 조직이 나 있을 리 만무했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공간에서 유일한 관계는 아내였고, 아내가 주는 아스피린을 매일 복용했지만, 병은 좀체 나아질 기미 없이 몸은 점점 더 허약해질 뿐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먹은 약은 소염제가 아니라 수면제 아달린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악몽 같은 현실을 잊기 위해 매일 꿈속으로 도주했던 것이다.


행복은 현실의 고비와 고통을 감당케 하는, 흔들리지 않는 힘이다. 행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유감스러운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고,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행복을 보상받을 것이라 믿는 것, 그것들이 조악한 현실을 수긍하도록 만들었다. 도대체 행복이 무엇인 줄 알고, 보물찾기 하듯 막연히 풀숲을 살폈던 것일까?


우리는 원할 때마다 행복을 떠올리며 수면제를 복용해 왔는지 모른다. 행복을 삼켜 중추신경을 억제시키고 강제로 수면상태에 빠지기 위해서 말이다. 꿈같은 환각상태에서 위중한 사태를 망각했고, 심각한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현실의 우울감이 몰려와 우리를 침몰시킬 것 같으면, 언제든 행복을 호출해 구출해 달라고 했을 테니까.   


또한 우리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절박한 순간에도, 당당한 미소로 타인을 대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지불된 액수만큼 합당한 만족을 느끼고 행복감을 성취할 수 있도록 환상을 조장하는 것, 고객이나 소비자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 감정을 페르소나 뒤에 숨겨 놓는 것, 이 모든 게 누군가의 행복을 위한 일들이었다 .  




K는 낙후된 도시 골목을 살리고 중년층의 창업을 지원하기 위한, 지자체의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맡은 총괄기획 책임자였다. 프로젝트에는 시나리오 작가, 기록물 관리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고, 해당 지자체는 프로젝트가 쇠퇴한 지역 상권을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보도했다.  

       

중장년층의 새로운 창업과 지역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행복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K의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현장 교육, 해외 연수, 창업 컨설팅 등 각 분야를 담당할 전담과 보조 인력이 꾸려졌다. 하지만, K가 프로젝트를 운영하면서 회사는 당초 약속했던 인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용역업체 입장에서는 입찰 규모 큰 다른 사업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K와 동료 둘이서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던 중 회사는 K를 새로운 프로젝트에 다시 투입시켰다. 도심에 커다란 금융 네트워크 시설을 설치하는 작업이었는데, K는 이미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전담하고 있던 터라 시간이 부족했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일부를 맡을 여력도 없는, K에게 "우리가 가진 건 역량 밖에 없는 거 알지? 이번 프로젝트가 잘만 되면 너에게도 큰 몫이 떨어질 거야."라고 회사는 말했다.     


두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맡게 되면서 K의 업무량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었다. 사업계획에 따른 단계별 마감 시한을 맞추기 위해 새벽까지 일했고, 겨우 두세 시간 잠을 잔 후 다시 이른 아침 출근하는 일을 반년 간 지속했다. 그럼에도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진행은 지연되었고, 수차례 문제들이 발생되었다. 그럴수록 K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완수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해.'라고 자신을 다그쳤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아 업무가 지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매일 지자체로부터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회사 임원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K를 모욕하거나 평가절하했으며, K가 불만과 고충을 이야기해도 혼자 알아서 처리할 문제라는 식이었다. 지자체는 K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프로젝트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K는 계약금 수억원을 손해배상할 처지에 몰렸고, 괴로웠던 K는 심리적 불안과 정신적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K는 도시재생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책임을 지고 사직하기로 했다. 그리고 K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K는 안절부절못한 채 4층 난간을 서성대며 연신 한숨을 뱉었다. K는 무언가를 사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통화를 마친 K는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잠시 그대로 서있는 듯하다가, 갑자기 난간을 뛰어넘어 공중으로 도약했다. 이후 그의 모습은 더 이상 CCTV에 잡히지 않았다. 경찰은 'K의 후두부에서 열창이 관찰되었고 다른 외력으로 인한 상처는 없다.'는 현장감식결과를 바탕으로, 추락에 의한 다발성 손상 사망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나는 신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안다. 설령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자기 선택이었거나 타인의 강요에 의해 벌어진 일일지라도, 그들의 행복을 위해 당신은 울 수도, 슬퍼할 수도, 화낼 수도 없었다. 채찍질을 목격한 누구도 '그만'이라고 외치지 않았기에, 당신은 발작처럼 일어난 웃음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누구라도 당장 멈추라고 했었다면, 당신이 공중도약을 해야 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카프카 <회랑 관람석에서> 일부 글 인용

* 사진출처: COPILOT DES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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