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뜨거운 열기 아래 느닷없이 서리가 내렸다. 서리는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다 어느새 흰 얼음꽃을 피웠다. 이처럼 설익은 풍경을 아름답다고 할까 아니면 불길한 징조라 할까, '하월비상(夏月飛霜)'은 살면서 예상치 못한풍경이다. 그것은 일상의 불안과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다.일상은 견고하고 안전해 보이지만, 실상은 곳곳에 신호등이 켜져 있다는 것. 만약 적색 신호를 무시하고 진행할 경우 자칫 큰 사고가 발생될 수 있다. 만약 신호가 없는 길이라면 더욱 주위를 살펴야 한다고 경고한다.
늦가을 서리가 신호를 보내면, 시베리아로부터 수만 마리의 까마귀들이태화강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그곳에서해질녘 군무를 펼치는 까마귀 무리를 보았다. 마치 검푸른 파도가 너울거리듯, 서로의 비행을 간섭하지 않은 채 엉킴 없이 움직였다. 그토록 인상적인 군무를보았다면 누구든 아찔하다고 감탄했을 것이다. 급격한 활강 비행에도 다치는 게 없는 걸 보면 거기엔 나름의 질서가 존재했다.
울산에 군집하는 까마귀의 객체수는 해마다 늘었다. 주변 자연환경이 보존되고 다양한 생물종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만큼 죽은 것도 즐비했을 테다. 죽은 것만 먹는 게 아니겠지만, 청소부란 별칭을 가진 까마귀에게 사체는 좋은 먹잇감이다. 까마귀는 본래 예부터 태양을 상징하던 동물이었다. 그것은 검은 깃털을 가진 세 발 달린 새로서(까마귀이거나 닭일 수도 있지만), 태양과 생명을 지닌 '삼족오'라 불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를 검게 칠했고, 검은 새를 하늘의 해처럼 여겼다.
누구도 까마귀 삶에 관심을 두지 않자 까마귀는 점차 빛을 잃었다. 어느 순간 까마귀는 어둠과 죽음을 주관했고, 사람들의 예기치 않은 불운을 책임졌다. 까마귀가 나무 꼭대기나 가파른 벼랑 끝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건,무관심하고 동정 없는 눈을 피해 몸을 숨긴 탓일지 모른다. 하지만 까마귀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서도 여전히 슬픔과 절망이 만연했다는 걸 사람들은 애써 모른 척했다.
체코어로 '까마귀(kavka)'란 이름을 가진 남자, 카프카는 워커스의 절망, 슬픔, 불행을 관찰했다. 그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부조리로 함축된다. 그들은 자본주의와 생산체계에 몰입했지만 남은 건 사무치는 아픔이었다. 그들은 끓임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에 끌려다니며 가축처럼 일했지만, 착즙기에 담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으깨졌다. 그런 일들은 날마다 반복되었다.
톨스토이는 "도살장이 유리로 되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무런 제약 없이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는 행동에 대한 경고다. 불요한 죽음을 생산하면서도 동물의 고통이나 절망을 느끼지 못한 건, 그것이 죽어갈 때 몸부림을 치는 걸 보지 못했던 까닭이다.보이지 않는 죽음의 과정을 거쳐 도축된 고기는 긴 갈고리 끝에 걸렸다. 고기는 다시 부위별로 해체되어죽음의 무게만큼 값이 매겨졌고, 그램 단위로 포장되어 시장에 유통되었다.
카프카는 고기를 거부하는 채식주의자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속 주인공은 "너무나 많은 고기를 먹었고, 그 목숨들이 배설되지 않은 채 찌꺼기로 몸속에 남아있다."라는 이유로 육식을 거부했다. 다른 생명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게 혐오스러웠던 것이다.나는 비록 채식주의자가 아니지만, 낮은 단계의 채식주의자라도 되어야겠다는생각을 한다.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들은 참으로 보기 좋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누구도 자신의 취미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함부로 죽일 권한은 없다.
그러나 나는 고백한다. 나는 워커스의 불행이 아주 먼 곳에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 외면했다. 드라마 속 슬픈 장면을 보면서 흘릴 눈물은 있었지만, 실제 벌어진 참극 앞에서 흘린 눈물은 부족했음을 말이다. 그들의 절망적 소식을 접했을 때, 도리어 나는 내가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에 안도했고 감사했다. 그런 사이 누군가의 울부짖음이 또다시 있었고, 그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 같은 방식의 도축이 계속 이뤄졌다. 도축된 자에겐 노동의 대가였던 임금으로 목숨값이 매겨졌다. 워커스의 죽음은 가축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나는 피 비린 내 나는 죽음을 맛보고 소비했다.
도망칠 곳 없는 워커스는 거푸집에 갇혀 자신의 불행을 쏟아붓고는 천천히 굳어갔다. 멸종 위기의 처한 동물처럼 고기, 가죽, 기름만 남겨놓고 말이다.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진 그들이 바랬던 건 복잡한 법령이나 난해한 절차가 아닐 테다. 절명의 시간, 그들이 원했던 건 따뜻하게 해 줄 토마트 수프였는지 모른다.
어느 날, 나는 추적추적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흐트러진 찔레꽃을 보았다. 그것은슬픈 향기를 아련히 품고 있었다. 작고 연약한 꽃잎들이 콘크리트 바닥 위를 굴렀을 때, 물기를 가득 먹은 것들이 하얀 슬픔을 짜냈다. 어떤 것이 밀물처럼 내 안으로 들어왔다.그리고 켜켜이 쌓인 내 슬픔을 무너뜨렸다.그것은 아마도 찔레꽃이 내게 동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워커스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더 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유감스러운 이 상황을 막을 수 없다. 내가 워커스의 유감을 이야기하려던 건, 그것을 들여다 봄으로써 위로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였다. 카프카처럼 높은 곳에서 까마귀 눈으로 세상을 내다보며, 예고 없이 찾아올 불행을 경고하려던 것.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마치 모든 걸 이해하겠다는 듯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바란다. 언젠가는더 많은 사람들이 고기 한 점 들어있지 않은 토마토 수프를 나누며, 정말 맛있다,라고 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