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기억
주말 아침, 딸은 건조한 날씨 탓인지 마른기침을 했다. 작은 이마를 짚어보니 미열도 약간 있었다. 아무래도 가벼운 감기 증세 같았다. 목이 따가운 아이를 위해 서둘러 죽을 끓였다. 먼저 당근, 양파, 무를 잘게 썰어 프라이팬에 넣고 참기름을 둘렀다. 야채를 살짝 볶다가 다진 소고기도 함께 집어넣었다. 지은 밥을 솥에 넣고 납작하게 주걱으로 눌렀다. 눌린 바닥이 누룽지처럼 타기 시작할 때 볶았던 야채와 물을 넣고 묽게 끓였다.
환절기만 되면 목이 붓는 증상, 그것은 취약한 형질이지만 우성인자처럼 유전되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처럼, 나는 딸에게 다시 그런 신체 조건을 물려주었다. 목이 칼칼할 때면 얼마나 빨리 목을 풀어주느냐가 관건이다. 그럴 때 주로 해 먹는 음식이 따뜻한 죽이다. 죽을 먹으면 쉰 목이 가라앉고 맹맹한 코가 뚫렸다. 걸쭉한 열기가 온몸을 감싸 오싹한 기운도 달아났다. 그렇게 죽은 답답한 몸을 편하게 만드는 음식이다.
만약 미국인이 목감기에 걸린다면 치킨수프를 떠올렸을 것이다. 실제로 닭고기는 황을 함유한 아미노산인 시스틴을 지니고 있는데, 이 아미노산은 기관지염을 치료하는데 필수적이다. 이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미국에선 아플 때 치킨수프를 먹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경제대공황을 거치면서 가난해진 사람들은 고기 없는 야채수프를 먹었다. 그래서 누구든 쉽게 치킨수프를 먹을 수 있게 개발된 게 캠벨의 치킨누들수프 통조림이다. 지금은 직접 조리하지 않아도 누구나 값싼 통조림을 구입해 치킨수프를 만들 수 있다.
1969년 7월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이 인류 최초로 달 표면을 밟았을 때, 그와 함께 달 여행을 따라간 음식도 치킨수프였다. 다만 치킨수프는 냉동건조된 크림의 형태였다. 그리고 같은 달, 미국의 생물학자인 브리스빈은 꼬꼬댁거리는 닭이 우주여행을 잘 견딜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그는 금속상자에 집어넣은 닭을 방사능 물질이 함유된 웅덩이에 매일 몇 분씩 빠뜨린 끝에 닭이 멀쩡하다는 걸 밝혔다. 향후 엘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 프로그램이 성공한다면, 닭은 지구가 아닌 행성에서 길러지는 최초의 가축이 될 것이다.
치킨수프 통조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앤디 워홀(Andy Warhol), 그는 1928년 슬로바키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운 형편 속에 아르바이트하며 상업예술을 공부했다. 캠벨의 수프 통조림은 수십 년간 그의 절박한 점심을 구해주었다. 그런 값싼 통조림은 팝아트를 닮았다. 앤디 워홀은 소수의 사람만이 예술을 소유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공장에서 생산한 통조림처럼 작품을 찍어냄으로써 일정액을 지불하면 누구나 예술을 소유할 수 있길 바랐다.
그렇게 앤디 워홀에게 예술이란 전시실에 있는 게 아니라 일상적 풍경 그 자체였다. 그런 작가적 태도를 폄훼하고 조롱하기 위해 누군가 일부러 갤러리 근처에 캠벨 통조림을 잔뜩 쌓아놓고 "진짜 수프는 29센트" 란 푯말을 붙이기도 했다. 1960년 초 그의 캠벨 통조림 그림은 1,500달러였다.
나도 치킨수프 통조림으로 무언갈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치킨수프를 먹은 뒤 어떤 기억을 보관하기 위한 용기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통조림을 세척해서 타임캡슐처럼 미래의 나 혹은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에게 편지를 넣어 보내는 것이다. 뚜껑을 만들어 밀봉시킨 후 하단에 유통기한까지 적는다. 그것은 정해진 날까지 절대 개봉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게 영구 보존된 기억은 한참 후 통조림 속에 무슨 기억이 있었는지조차 잊었을 때 꺼내는 것이다. 정말 재밌을 것 같다.
기억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퍼즐로 끼워 맞추는 게 아니다. 기억은 과거 어떤 순간에 느꼈던 감정과 같이 떠오른다. 그것은 따스했거나 차가웠던 시간의 퇴적층과 같다. 기록된 것들이 시계열로 쌓이면서 머리와 가슴에 화석처럼 응축된다.
언제부터 찬장에 두었는지 모를 통조림 하나가 구석진 곳에 있었다. 창고에 쌓인 눅눅한 연탄처럼 기한을 다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뜯어보았다. 통조림 속에는 연한 꽁치 살과 야들한 가시뼈가 그대로였다. 그제야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소비기한이 아니란 걸 알았다. 유통기한은 단지 판매할 수 있는 기한을 둔 것일 뿐, 유통기한이 지났어도 안에 걸 먹을 수 있었다.
멸균된 꽁치처럼 일순간 뜨겁고 열렬했던 기억이 내게도 있다. 그토록 순수했던 기억을 깡통에 담아 마르지 않도록 용액을 부어준다. 달달한 기억을 남기고 싶다면 설탕물을 첨가하고, 짭조름한 걸 원한다면 소금물을 부어서 원하는 맛이 배도록 만든다. 그렇게 나는 기억을 보관하기 위해 오늘도 통조림을 만들고 있다.
< 참고자료 >
* 앤드루 롤러 <치킨로드>
* 위키피디아 <Campbell's Soup C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