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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by Mar 06. 2024

여기 어딘가, 양조위가 있을 것 같다

Kau kee in Hong Kong, 2024

홍콩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금융 허브로 번성한 홍콩의 마천루들이 빚어내는 멋진 야경.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홍콩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특유의 분위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홍콩영화는 중경삼림이었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에 방문해 보고 싶었다.

멋진 야경은 모두가 방문하는 스타의 거리와 침사추이 종루, 골든 바우히니아 광장 등 여기저기 야경 명소에서 볼 수 있었다. 홍콩의 야경이 특별했던 이유는 마천루의 화려한 레이저나 조명 뿐 아니라, 그 앞의 바다가 만들어 내는 바닷내음과 물소리, 끊임없이 양안을 오가는 페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두 가지를 이어주는 사람이 있다. 야경의 하이라이트인 심포니 오브 라이트 구경을 마치고 스타의 거리를 산책하는데, 몇 몇 핸드프린팅 옆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그 중 낯익은 이름이 들린다. '양조위'. 중국어로 읽는 발음이라 '양처위' 정도로 들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홍콩이 낳은 세계적인 배우는 여럿 있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독보적인 배우 양조위의 핸드프린팅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가장 사람이 많았던 핸드프린팅은? 전설적인 배우, 장국영이었다. 장국영의 핸드프린팅 앞에서는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담아, 그의 영어 이름인 레슬리를 부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장국영의 핸드프린팅이 아니라,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중경삼림의 양조위가 자아내는 특유의 분위기는 굉장히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나에게 있어 홍콩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인상을 가장 크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다소 번잡스럽고,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고, 길거리에 앉아 덮밥을 휘적휘적 먹고, 밤에는 허름한 가게에 야식을 사러 간다. 그런 와중에도 촌스러워 보이지만 화려한 네온사인도 잊을 수 없다. 단순한 교통수단이지만 영화에 등장해 유명해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화려함과 초라함이, 마천루와 청킹맨션이 공존하는 홍콩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갈 때 일부러 이어폰을 챙겨 갔다. 입구에서 왕페이의 몽중인을 들으며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면, 영화 속에 내가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와 스쳐 가는 누군가가 양조위일 것 같고, 왕페이일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왠지 총소리가 들릴 것 같아 으스스한 청킹맨션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배우 양조위는 나이가 들어 이제 중후한 모습을 연기하고 있으나, 영화 속 양조위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 그런 그가 어디선가 식사를 하고 있을 것 같은, 홍콩의 유명 식당 카우키가 우리의 식사 장소가 되었다. 홍콩의 카우키는 우리나라에도 너무나 잘 알려진 식당이며, 미슐랭 빕 그루망 등급에 선정된 식당이다. 홍콩은 다양한 면 요리로 유명한데, 카우키는 일반적인 완탕면이나 에그 누들은 아닌 양지 국수와 카레 국수로 유명한 곳이다. 가이드북에는 양조위의 단골 맛집이라는 설명이 빠지지 않는다.




워낙 유명한 식당답게, 늘 긴 줄이 늘어선다는 홍콩의 카우키. 회전 속도가 대단히 빠르기 때문에 긴 줄에 비해 기다리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다고 한다. 저녁 8시 언저리에 방문했음에도 줄이 상당히 길어서 깜짝 놀랐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 유명한 식당이라 다 한국사람이 아닐까 싶었는데 한국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현지인 같아 보이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또 중국 본토 관광객 같아 보이는 사람도 제법 많다. 이 골목은 절반 이상이 식당인데, 카우키에만 이렇게 긴 줄이 생겼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가게에 붙어있는 불친절한 안내문들을 잔뜩 볼 수 있었다. 캐시 온리, 외부 음식 반입 금지는 그러려니 하더라도, 유모차 금지, 짐 금지는 처음 봤다. 게다가 최소 주문 금액이 1인당 70홍콩달러, 우리 돈으로 12,000원이라는 안내문까지. (게다가 이 안내문은 귀신같이 한국어로도 써 있다.)


사실 12,000원이 그렇게 비싼 금액은 아니다. 카우키에서 어지간한 메뉴를 주문하면 70홍콩달러는 넘어가니까 그렇게 부담스러운 부분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안내판이 그렇게 좋은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의 리뷰에 '불친절하다' 라는 평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일 것이다. 미슐랭 가이드에서 여러 번 선정된 집인데도, 그 흔한 미슐랭 스티커 하나 붙여놓지 않고 이런 안내판만 잔뜩 붙여 놓았다.


이런 불친절은 관광객에게 국한되지 않아, 중국 본토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관광객은 계좌이체를 해 줄테니 현금을 줄 수 있는지를 줄 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묻긴 했지만, 계좌이체를 받을 방법이 없으니 서로 방법이 없었다. 결국 다른 중국 사람에게 돈을 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번잡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대기줄은 길게 늘어 서 있다. 이 날만의 일은 아닐 것이, EBS의 세계테마기행에서도 이 카우키를 방문하기 위해 출연자가 1시간 정도 줄을 섰다는 내용이 나온다.


메뉴는 굉장히 많다. 음료는 21가지, 국수를 포함한 음식은 35가지. 어설프게 번역기를 돌린 수준이지만 한국어 설명이 같이 되어 있다. 총 다섯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있이 카우키를 찾는 많은 관광객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카우키에서 보통 흔히 찾는 메뉴는 일명 '4번', '14번' 국수다. 번역명으로는 '쇠고기 안심 튀김국수', '카레 쇠고기 안심 노가니 튀기 쌀국수' 인데, 대단히 성의 없는 번역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번역기 넣고 돌려도 이것보다는 잘 나오지 싶다. 번호가 붙어 있어 주문할 때 편리하다. 손으로 4, 14를 만들어 줘도 알아듣는 듯 하다. 우리는 중국어를 할 줄 알아서 편하게 주문하기는 했다. 각각의 가격은 75홍콩달러로, 최소 주문 금액은 가볍게 넘는다. 따로 물을 주지 않기 때문에, 아이스 레몬티도 하나씩 같이 주문했다. 이렇게 하면 인당 100홍콩달러 정도가 되어, 국수 가격치고는 다소 비싸지기는 한다.


주방은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중경삼림의 야식 가게가 생각나는 풍경이다. 영화의 야식 가게는 허름하고, 특별히 뭐가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세월이 오래되어 빈말로라도 깔끔하다고 하기는 좀 어려운 느낌이다. 카우키의 주방이 딱 그렇다. 오래 되어 보이는 주방의 냄비에서는 육수와 카레 소스가 말 그대로 펄펄 끓고 있다. 냄비는 꽤 오래 되었는지 카레 물이 들어 보일 정도고,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다. 다른 집기들도 오래 되어 보인다. 미슐랭 가이드에 따르면, 카우키는 1930년대부터 영업을 했다고 하니, 그때 그 시절 홍콩 영화에 등장하던 국숫집, 야식집들과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곳이기도 하다.


홍콩 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접하게 되는 문화가 바로 '합석'이다. 의외로 모든 식당에서 합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딱 세 곳에서 합석을 했는데 대부분 오래 된, 체인점 형태가 아닌 노포들이다. 이곳 카우키와 역시 오래 된 곳인 딤섬 가게 린흥귀,. 그리고 우리에게 유명한 토스트 가게 란퐁유엔까지. 역시 미슐랭 맛집으로 유명한 막스 누들이나 대형 체인점인 만와, 취와 같은 곳은 작기는 해도 2인 테이블이 많아, 2인 이상이라면 합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눈치도 좀 생겼는데, 밖에서 슬쩍 들여다 보았을 때 원형 테이블 내지는 길쭉한 사각 테이블이라면 합석 가능성이 매우 높고, 작은 2인용 사각 테이블 위주라면 합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합석하더라도, 옆 사람에게 별로 신경쓰는 분위기는 아니니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다.


한국이라면 잘 쳐야 세 사람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기어이 네 명을 앉힌다. 그리고 지나가기도 비좁아 보이는 사이로 뜨거운 국수를 들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데, 부딪히지 않고 어디에 무슨 음식을 가져다 줘야 하는지 기억하는 것이 용해 보이기까지 한다.




메뉴는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나오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육수는 계속 끓고 있고 면 삶는 시간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나온 것은 쇠고기 안심 쌀국수. 국수는 한번 튀겨낸 국수다. E-FU NOODLE 이라고 하는데, 칼국수와 비슷하게 납작하지만 좀 더 얇은 달걀 면을 튀긴 다음 말려서 건조한 면이다. 개인적으로는 컵라면 중 튀김우동 면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만큼 친숙하여 부담 없는 맛이다. 고기는 대량으로 끊임없이 삶아내는 것 같지 않게 부드럽게 잘 삶았다. 퍽퍽하고 질깃하지 않아 면과 같이 먹기에 부담이 없는 식감이다. 고기만 입 안에 남아 계속 씹게 되면 영 만족도가 떨어질 텐데, 제법 두꺼운데도 그런 느낌이 없다.


국물은 오래 끓여 그런지 진하고 약간 기름진 느낌인데, 역시 이국적인 맛이라기보다는 친숙한 맛이다. 고깃국을 이렇게 진하게 끓여 내어 오니 묵직한 맛이 좋다. 한식에서 접하는 국물들보다는 좀 더 진하고 묵직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같은 계열의 맛이다.



다른 하나는 카레국수. 역시 카우키에서 유명한 메뉴다.

도가니가 들어가 있어 쇠고기 안심 국수보다 더 국물이 묵직하고 약간 끈적이는 느낌이 있다. 아마도 카레가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 묵직함이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카레가 좀 더 가벼운 풍미를 이끌어 낸다.


다만, 카레는 어쩔 수 없는 분말 카레의 느낌이 난다. 어디서 먹어도 맛있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카레 맛이라는 의미다. 도가니탕과 카레는 각각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요리고, 도가니 카레 탕은 없으니 특별한 요리라고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리고 분명 취향에 맞는 맛이다. 하지만 만약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쇠고기 안심 쌀국수가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라멘집에서 가장 만들기 쉽지만 막상 제대로 하기가 정말 어려운 메뉴가 미소라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미소된장이 어느정도 맛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대강 만들어도 맛이 나고, 또 한편으로는 아무리 육수를 정성껏 내고 다른 것에 신경을 써도 된장 맛이 라멘을 덮어 버려서 차별화를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면의 카레가 딱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다만, 이 카레 국수는 들어간 도가니와 소고기의 양으로 보아 카레가 맛을 약간 덮어버리지 않았나 한다.


완탕면 가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길고 얇은 에그 누들이 취향에 맞지 않는 분은 카우키의 면이 좀 더 취향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양조위가 과연 지금도 이 사람 많은 가게에서 줄을 서서 먹을까?

포장이 가능하다고 하니, 먹고 싶다면 포장을 하지 않을까. 사실 대 배우가 된 양조위가 이 좁은 식당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식사하기란 서로 불편한 일일 것이다. 빠르게 식사를 하고 나가는 가게 흐름에서, 양조위를 보겠다고 사람들이 국수는 안 먹고 쳐다보고 있으면 가게도 불편하고, 기다리는 손님도 불편하고, 본인은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양조위는 본인을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일년에 일정 기간 이상 일본에서 거주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60을 넘어 노회한 배우가 되어 버린 양조위를 이 가게에서 만나기란 어려울지라도, 홍콩 영화의 팬이 그리워하는 그 시절, 스크린에 남아 있는 젊은 시절의 양조위는 이 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푸른 경찰 제복을 입고, 다소 지친 표정으로 노점상에 앉아 덮밥을 먹는 그 시절. 아직 이 곳에는 그 시절의 정취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음식맛도 좋지만,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면 더 인상깊은 식사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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