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차를 사기 전에는 어디를 가도 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택시는 가격이 무섭고 지하철은 그냥 무서워서 말이죠. 큰애는 보통 학교에 있으니 주로 갓 돌 된 둘째를 데리고 다녔는데 유모차에 태우거나 힙시트에 앉혀서 안고 버스에 타곤 했습니다.
버스에 탈 때 유모차에서 애를 꺼내서 안고 유모차는 접어서 들고 타야 해요. 휠체어에 탄 장애인이 버스에 오를 때는 버스 높이를 낮추고 철판으로 된 경사 진입로를 펼쳐서 휠체어가 올라설 수 있게 해 주는데 유모차에는 따로 안 해주더라고요.
하나 데리고 타기. 난이도 1
아이를 안고 버스에 오르면 그다음부터는 대체로 수월합니다. 아이가 있는 걸 보면 대개는 자리를 양보해 주시거든요. 그럼 버스 구석 벽면에 유모차를 세워두고자리에 앉곤 합니다.
한 번은 유모차 없이 버스에 탔는데요, 아이는 힙시트에 앉혀서 안고 있었고요. 승객이 많아서 누가 자리를 양보하고 양보받을 여유가 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충 손잡이 잡고 서 있었는데 갑자기 버스 뒤쪽이 시끌시끌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봤습니다.
둘 데리고 타기. 난이도 2
발단은 어떤 할아버지였는데요, 이 분이 큰 소리로 뭐라고 외치는데 꼭 누구를 비난하는 것 같은 어조였어요. 뉴욕에 간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리스닝이 잘 안 돼서 뭐라고 하는 건가 유심히 들어보는데 아.. 뉴스로만 접하던 인종차별이더라고요.
"중국 X들은 집에 가야 돼! 중국 X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있어! 중국 X들을 위해서 이 나라를 지킨 게 아니야!"
뭐 이런 종류의 이야기였습니다. 이른바 'F 워드'를 계속 쓰시더라고요. 고개를 쑥 빼고 보니까 빨간 모자를 쓴 백인 할아버지인데 그 영화 크림슨타이드에 나오는 진핵크만처럼 완고한 주름 깊은 할아버지 딱 그런 스타일이었거든요.
하나 데리고 유모차 갖고 타기. 난이도 3
그런데 막 뭐라고 떠드는데 정말 창피한 얘기입니다만 이 분이중국인더러 "고 홈 고 홈" 그러는데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 '홈'이 집을 말하는 줄 알고 '너 외출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 있으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요. 물론 사실은 그게 아니라 너네 나라로 꺼지라는 뜻이죠. 그때는 몰랐어요.
할튼 그렇게 한참 중국인 욕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할아버지 옆에 있는 사람들이 드디어 한 마디씩 하시더라고요. '너는 옳지 못하다'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모두 이민자다' '그런 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지 못한다' 엄청 어디서 들어본 공익 캐치프레이즈 같은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둘 데리고 유모차 갖고 짐 들고 타기. 난이도 사람살려
그러다가 빨간 모자 할아버지가 더 크게 헛소리를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고 그러는 흐름이었는데 어느 순간 버스기사가 버스를 정거장에 세우더니 그 할아버지 보고 내리라고 하더라고요. 승객은 버스 기사의 정당한 하차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무슨 규정이 있는지 할아버지는 군말 없이 내렸습니다. 버스 안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는데요.
사실 부끄럽지만 저는 혹시 몸싸움이라도 나나 해서 흥미 있게 보고 있었는데 싱겁게 끝나버려서 내심 아쉬워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 옆에 같이 서 있던 흑인 아주머니가 갑자기 제 어깨를 톡톡 치더니 괜찮다고 위로를 해주는 거예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실용 회화가 쑥 들어와서 순간 당황했는데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반복하시길래 잘 들어보니 아뿔싸! 이 분은 저를 위로해주고 계신 거였어요. 아까 그 빨간 모자의 인종차별주의자 할아버지는 다름 아닌 저한테 너네 나라(중국)로 꺼지라고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말할 때 분명히 '차이나'라고 해서 저는 당연히 중국을 싫어하는 일반론(?)을 펴는 건 줄 알았거든요. 사실 저도 우리나라에만 있다 보니 마주치는 중국인이란 대개 몰상식한 단체 관광객일 때가 대부분이고 중국이라는 나라에도 호감이 없어서 그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는 됐거든요. 물론 표현 방식은 틀렸지만.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는 차 안에 있던 유일한 차이니즈(?)인 저한테 얘기를 했던 거죠. 친절한 흑인 아주머니는 그 불쌍한 차이니즈(?)를 위로해 주고 말이에요.
거기다 대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요' 하는 것도 웃기지만 뭣보다 인종차별을 대놓고 당해본 적이 처음이라 너무 뭐랄까 재미있었어요. 한국인이 평생 한국에 살면 언제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소리를 들어보겠어요. 여러 번 당하면 불쾌할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처음 겪는 일이라 너무 생경하고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