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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사막에서 차 기름 바닥난 이야기

장독대 뚜껑의 대가는 혹독했다

지난 이야기. 저는 가족을 이끌고 사우디 제2의 도시 젯다를 구경하고 리야드로 돌아가는 길에 사막 한가운데서 차 기름이 거의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집까지 남은 거리는 약 700km. 둥.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으면 그나마 위안이 좀 되겠지만, 주유 경고음을 듣고 난 다음에야 계기판을 봤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건 '--' 표시뿐이었죠. 등에 식은땀이 쭉 흐릅니다.

앞에 낫띵

사우디에서 보험사 견인을 불러본 적도 없지만, 부른다고 해도 방금 떠나온 도시에서 200km 이상 떨어져 있는 사막 한가운데로 제대로 찾아와 줄지도 모르겠고요. 햇볕을 피할 곳이라고는 파리 날개만큼도 없는 데서 40도짜리 태양볕에 구워지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거죠.


일단 에어컨이 꺼지면 정말 끝이니까 무조건 기름을 아껴야 하기에 갓길로 얼른 차를 대고 대책을 생각해 봤습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고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쪽으로 행동하도록 합니다.

사막에서는 뭐라도 나타나면 반갑습니다

1. 주유등에 불이 들어왔다는 건 연비주행을 하면 50km 정도는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보수적으로 40km로 잡고 하필 또 에어컨을 풀가동하고 있으니 30km 정도로 잡는 게 좋겠습니다. 마구잡이로 희망회로를 돌리면 곤란하니까 최대한 보수적으로 해야지요.


2. 이대로 계속 갔을 때 30km 안에 주유소가 나올지 살펴봅니다. 구글 지도가 도움이 됩니다. 다행히 인터넷은 잘 터지네요. 사막 한가운데서 어떻게 되는 건지?


할튼, 지도상으로 20km 앞에 휴게소가 있습니다. 주유소도 있네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구글 지도에 나온 사진이 아주 흐릿하고 해상도가 작은데  아무리 봐도 폐업의 냄새가 납니다. 이용자 리뷰나 별점, 사진 같은 추가 정보가 아무것도 없어요. 경험상 이런 곳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 그다음 주유소는? 거기서부터 또 40km를 달려야 나옵니다. 두 번째 주유소는 없는 선택지라고 봐야겠네요.


첫 번째 중간 결론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계속 진행하는 건 첫 번째 휴게소가 폐업하지 않았다는 데 올인하는, 매우 확률이 낮은 도박이 되겠습니다.


3. 되돌아가는 방법을 고려해 보죠. 즉, 계속 진행하다 램프에서 유턴해서 총 주행거리 30km 안에 아까 그 주유소로 되돌아갈 수 있 따져봐야 합니다.

사우디 고속도로에서 유턴하는 램프는 10km에 한 번씩 나옵니다. 불법유턴이 문제가 아니라 쪽 차로를 중앙선 대신 사막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램프를 통하지 않고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휴게소를 떠나고 램프를 1개 지났던 것 같습니다. 10km 하고 조금 더 다는 뜻이지요. 혹시나 해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찾아봤지만 앞뒤로 램프가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워낙 가리는 게 없어서 1km 정도는 육안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는 건 운이 좋으면 앞으로 2km쯤 앞에 램프가 나오고, 그걸 타고 20km를 되돌아가면 22km만에 주유소에 도착한다는 거죠.

하지만 운이 없다면 앞으로 8km는 가야 램프가 나온다는 건데 그 뒤에 20km를 되돌아가면 28km만에 주유소에 도착하네요.


되돌아가는 방법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램프를 1개만 통과했다는 제 기억이 정확하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만약 무심코 램프를 2개 이상 지나왔는데 모르고 되돌아간다면 주유소에 도착하기 전에 기름이 바닥날 겁니다.


지나온 주유소까지 거리를 확실하게 알면 선택이 수월하겠는데 문제는 그 주유소가 구글 지도에 안 나온다는 겁니다. 할튼 업데이트가 느린 건지 원인은 모르겠지만, 실제로 있는 길이 지도에 없기도 하고 없는 길이 나와 있기도 하고 그럽니다. 100%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두 번째 중간결론이 나왔네요. 뒤로 되돌아가는 건, 의식적으로 외운 적 없는 순수한 단순 기억에 올인하는 매우 위험한 도박이 되겠습니다.


자, 정기예금 같은 무위험 상품은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리스크가 있고 꽝을 뽑은 결과는 치명적일 겁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은가요?


폐업하지 않았길 바라며 계속 가기

VS

기억이 정확했길 바라며 되돌아가기

번화가! 인류가 만든 건물이 있으면 무조건 번화가입니다

저희는 되돌아갔습니다. 조금 가다 보니 램프가 나왔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더라고요. 아까 주유소를 봤잖아요. 일단 들렀다 나온 확실한 주유소가 뒤에 있다는 걸 아는데,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걸 믿고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차를 돌린 건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어차피 도박이었는데 적절한 베팅이었다고 해야 하나요? 되돌아가면서 보니 램프는 1곳만 통과한 게 맞았고 결과적으로 꽤 여유 있게 주유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기름을 가득 넣고 주행 가능 거리가 600km까지 늘어난 걸 보고 나니 어찌나 든든하던지요. (쏘렌토 신차였는데 연비가 10km/L가 안 됐던 게 함정)

다시 출발해서 이번에는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가면서 확인해 보니 지도에 폐업 냄새를 풍기던 휴게소는 그런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주유소는 80km나 가서야 나왔지요.


나중에 듣기로 사우디에서는 여름에(당시는 7월이었습니다) 장거리 고속도로를 타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이라고 합니다. 기름이 문제가 아니라 차가 과열돼서 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두 번은 못할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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