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코(sicko)는 사실일까?
미국에서는 일단 다치면 안 됩니다.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안 됩니다. 명심하세요. '다치지 않기'. 그리고 혹시 다쳤다면, 이때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일단 응급실로 가잖아요. 미국에서는 병원에 가기 전에 할 게 있습니다.
다치면 일단 전화를 하든 인터넷 검색을 하든 '내가 어딜 다친 건지' 혹은 '내가 무슨 병에 걸린 건지' 대충이라도 파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게 내 보험상품에서 보장해 주는 병인지 알아야 해요.
보장해 주는 범위라면 안도의 한숨을 한 번 쉰 뒤에 다시 전화나 인터넷으로 내 보험사랑 제휴가 된 병원을 찾으면 됩니다. 물론 증상은 내가 대충 찾아본 거니 진료를 받고 나서 보험 처리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운명에 맡겨야 하죠.
우리나라처럼 무조건 가까운 병원으로 뛰면 안 됩니다. 아니 안 될 것 없는데 약 8개월 정도 뒤에 우편함에서 0이 굉장히 많이 붙은 고지서를 발견하고 '그때 괜히 뛰었다'라고 후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뉴욕에 간지 얼마 안 됐을 때 음식도 입에 안 맞고 해서 요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칼에 베인 거죠. 정확하게는 슬라이서에 베였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이때 바로 병원으로 뛰지 않고 좀 알아봤으면 집에서 빨간약 바르고 말았을 텐데 그때는 그런 경황이 없었어요. 상처 속으로 뼈도 보이는 것 같고 막 그랬습니다. 하여 일단 싸매고 집에서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갔습니다.
미국은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곳이라 그런지 병원에 가면 통역 서비스가 아주 잘 돼 있습니다. 현장에 한국어를 하는 의료진이 있는 건 아닌데 화상으로 연결을 해주더라고요. 어떻게 다쳤는지, 기저질환이 있는지 그런 걸 물어보고는 '드레싱'을 받았습니다.
드레싱이요. 드레싱 아시죠? 빨간약으로 닦고 거즈로 말아주는 겁니다. 그리고는 집에 가는 길에 CVS (편의점입니다) 들러서 소독약이랑 거즈 사서 내일부터 집에서 직접 하면 된대요. 그리고 돈 안 내고 집에 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아 드레싱이 워낙 별거 아니니까 그냥 가라는구나' 했어요.
그리고 약 8개월 뒤에 사고를 잊을만할 때 우편함에서 0이 굉장히 많이 붙은 고지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에 제가 가입했던 의료보험은 상당히 좋은 거였어요. 일단 집 근처에서 아무 데나 갔는데도 보험사랑 제휴가 된 곳이었을 정도로 넓게 보장하는 회사였고 보험료도 비쌌거든요.
손가락 드레싱 청구서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사진을 찍어두질 않았나 봐요. 그때 받은 청구 금액은 3800달러였습니다. 지금 환율로 500만 원 정도 되네요. 그중 보험사 몫이 95%고 저는 5%인 200달러를 부담했습니다. 드레싱 한 번 값으로 30만 원이면 크죠.
만약 다쳤는데 보험이 적용 안 된다면, '손가락을 베였는데 드레싱에 500만 원 낼래,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집에서 처치하고 말래?' 병원으로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건 오래된 명제입니다만 의료보험만큼은 정말 우리나라가 잘 돼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기반은 1년에 병원을 한 번도 안 가는 대다수 고소득 고액납세자 덕분이지요.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요. 위에 영수증은 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다른 처치를 받고 나서 받은 청구서입니다. 항목을 잘 보면 진료비는 총 840달러가 나왔는데요. 120만 원 정도 되려나요. 그중에 시그나(보험사입니다)가 236달러를 대신 지불했고, 그리고 603달러는 시그나가 깎아줬다고 돼 있습니다.
또 다른 청구서에는 디스카운트가 아니라 네고시에이트라고 된 것도 있어요. 보험사가 돈을 대신 내주는 건 이해가 되는데 네고를 했다는 건 뭔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번에는 본인 부담금이 10달러가 됐으니 불만은 없습니다만. 그냥 그렇다고요.
미국에 가면 다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