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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Apr 23. 2024

내 리어왕 할아버지

현명하고 지혜롭게 늙을 수 있을까?


나의 할아버지는 말년에 치매에 걸리셨다. 내가 철이 들어갈 무렵인 중학교 때부터 증세가 악화되셔서 이후 5년간 치매를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굉장히 똑똑하셨던 분이라고 한다. 엄혹했던 일제시절에 기술을 배우셔서 독립이 된 이후에는 그 기술을 바탕으로 고 정주영 회장이 건물을 올릴 때 건물의 난방설비를 설계하셨다고 한다. 독립 이후 그런 기술공은 매우 희귀했을 때라 할아버지는 당시에 많은 돈을 버셨고 나름 부유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부유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은 이미 할아버지의 전성기가 한참 전에 끝났을 때였고, 젊고 유능한 기술공들에게 밀려난 할아버지는 점점 가난해졌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노년시기의 모습은 아버지에게 의지하시며, 매일 술과 담배로 하루를 보내시던 쓸쓸한 모습만 기억될 뿐이다. 거기다 말년에 치매까지 앓으셨으니 할아버지의 삶은 얼마나 슬픈 결말인가?


그래도 할아버지의 말년은 내게 순수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치매를 앓으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치매는 사람을 늙은이에서 아기로 변신시킨다. 아기는 순수하다.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순수성을 가지고 있다. 늙은 사람은 현명하다는 말은 늙은이들을 위로하는 말이지만, 아기가 순수하다는 말은 실로 참이다.


아기로 변한 할아버지는 언제나 볼에 불그스름한 홍조를 띤 얼굴로 생긋생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셨다. 그러면서 항상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우리 손주 언제 커서 할아비 막걸리 사줄 거냐?”


중학생 때의 나의 모습은 할아버지의 키와 비슷할 정도로 부쩍 자란 모습이었지만, 아기로 돌아간 할아버지에게는 여전히 갓난아기와 같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젊어서는 유능하고 똑똑했으며, 늙어서는 우울하고 쓸쓸했고, 말년에는 아기처럼 맑고 순수했다. 이런 할아버지의 삶을 보며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오늘 ‘리어왕’을 읽었다. 노년에 망령이 든 리어왕은 아첨을 잘하고 간악한 첫째 딸과 둘째 딸에게만 재산을 물려주고, 정직한 막내딸은 달콤한 아첨을 못한다는 이유로 나라에서 추방해 버린다. 이런 어리석은 판단을 해버린 리어왕은 결국 사악한 두 딸에게 버림받고 진짜 미쳐버리고 만다. 막내딸은 미쳐버린 아버지를 보며 슬퍼하지만 운명은 결국 리어왕과 막내딸을 죽음으로 내몬다.


리어왕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미친 리어왕을 계속 따라다니며 풍자와 조롱을 해대는 광대의 대사이다.

광대:아저씨가 광대였다면 난 때려주었을 거야. 때가 되기 전에 빨리 늙어버렸으니까.
리어왕: 그게 무슨 소리냐?
광대: 현명해지기 전에 늙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광대의 풍자 노래>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은 장님이 되어 모른 척 하지만
아비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자식은 전부 효자가 되지
운명의 여신은 매춘부처럼 가난한 사람에게는 문을 잠그네


리어왕의 불쌍한 처지는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다. 참된 자를 몰라보고 버렸으며, 속된 자들에게 노년을 의지하려 했으니 말이다. 


혹시 '리어왕은 처음부터 미쳐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딸들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라고 강요하는 모습도 그렇고 막내딸이 ‘부모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도리이지만 남편이 생기면 지금처럼 과 똑같은 사랑을 드리긴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다.’는 말에 삐져버려서 ‘너 재산 안 줘!, 추방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이 제정신 같지는 않다.


솔직히 셋째 딸이 유연하지 못하긴 했다. 어르신이 듣고 싶은 말 좀 해달라고 하시면, 못 이기는 척해드리면 될 일인데 꼭 맞는 말이라고 쳐도 그 자리에서 해야 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과도한 솔직함은 때론 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비극이 리어왕이 이미 미쳐있었고, 눈치가 없던 셋째 딸이 너무 솔직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후대의 평가를 보면 리어왕의 교훈은 ‘자식에 대한 그릇된 사랑’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이를 ‘인간의 그릇된 욕망’에 대한 경계라고 한 차원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리어왕의 교훈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다. 그저 ‘사람이 현명하게 늙기는 힘들다.’는 사실과 ‘노인분들께는 뻣뻣하게 굴지 말고 유연하게 대접해드려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리어왕의 교훈이라 생각한다.


또 리어왕의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리어왕이 가진 권력과 재산은 상징성이 큰 소재일 뿐이다. 일반적인 가정에서도 부모님의 상속문제는 집안의 분란을 일으키는 원흉이 아닌가? 만약 부모님이 현명한 처사를 못하시는 경우라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지도 모를 큰일이다.


미리 예방책을 준비하는 것도 어찌 보면 완벽한 대비는 아니다. 현명하게 늙지 못하면 미쳐버린 노년의 내가 미리 만들어놓은 방둑을 멋대로 허물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저 우리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노년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현명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긴 이르다. 우리가 노년을 잘 보내는 방법이 또 하나가 남아있다. 현명하길 포기하고 순수해지길 바라는 방법이 남아있다. 우리 할아버지처럼 치매에 걸리지 않더라도 과도한 욕심과 삶의 후회를 버려버린다면 늙어서 순수한 동심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명하고 싶다는 것도 어찌 보면 욕심이니 그런 욕심도 버리고 불가에서 말하는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 현명한 노인이 되기 어렵다면 순수한 노인이 되면 된다. 아기로 태어나 아기로 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깨끗한 것인가? 아! 물론 나는 아직도 현명하고 지혜롭게 늙고 싶는 욕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책도 보고 사람들과 많은 대화도 나누고 가족들과 뜻깊은 시간도 많이 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처럼 변한다면 적어도 맑고 순수한 노인이 되고 싶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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