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만한 인간], 박정민
왠지 오늘 내 모습 찌질해 보여.
그런 날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서 마냥 불안한 날. 그럴 땐 뭐라도 보는 게 좋습니다. 에세이라 쓰고 남의 일기장이라 읽는 그런 글들을 보면 참 좋죠. 사람 만나는 것도 귀찮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로받지는 못하지만, 남의 글을 보면서 위로받을 가능성은 아직 남았기에 그래서 에세이를 봅니다.
그럼 어떤 에세이를 보는 게 좋을까요? 가장 좋은 건 고전이라 생각해 존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었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20페이지 정도까지 요약이 먼저 적혀 있길래 찬찬히 읽어봅니다. 그렇게 잘 보고 있는데 막내가 무릎으로 올라옵니다. 도저히 볼 수 없겠다 싶어 책을 덮었습니다. 절대 머리가 아파서 그런 건 아닙니다. 전 그저 좋을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재웠습니다. 아직도 뭔가 불안합니다. 그래서 뭐라도 읽자고 '밀리의 서재'를 뒤집니다. 요즘에는 기능도 좋아서 추천책들을 몇 번 슥슥 돌려보니 눈에 띄는 책이 있습니다. 오늘 본 에세이는 박정민 배우의 '쓸만한 인간'입니다.
에세이의 미덕이 무엇입니까? 교훈? 감동? 특별함? Nop. 에세이의 미덕은 재미입니다. 일본 작가 중 G.O.A.T(역사상 최고) 불리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에세이는 재밌게 씁니다. 쓸데없이 기교 부리지 않고 묵직하게 유머라는 직구를 던지는 게 에세이의 미덕이죠.
박정민의 글은 영화 평점으로 치면 5점 만점에 4.5점이라 생각합니다. 만점이 아닌 이유는 작가가 의도한 바이기도 한 전체적인 글의 찌질함 때문인데, 이게 또 매력이기도 합니다.
가령, 이 책은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찌질하다의 반대말이 뭔가. 특별하다? 잘 나간다? 바지통 6반으로 줄이고 머리에 젤 바르는 상남자스타일? 아니, 찌질하다의 반대말은,
찌질했었다.
소주 먹고 소리치며 울다가 성남시청 앞 공원의 그늘에서 잠들어버린 적도 있다. 그늘이 반만 걸쳐 반만 타버린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못하는 것도 없지만 잘하는 것도 딱히 없는, 잘생기지 않았는데 개성 있게 생겼다기엔 한 끗이 부족한, 못돼 처먹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걸 착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아주 애매한 선상에 위치한 인간, 이른바 과도기적 인간, 나쁘게 말하면 그냥 좀 찌질이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이런 찌질하면서 날 것 같은 표현들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웃음 타율로 치면 꽤 칩니다. 4할 이상은 됩니다.
'와... 나는 이렇게 절대 못쓰겠는데?'
이 책을 보면 넘지 못할 것 같은 벽도 느낍니다. 자신의 인생을 무기로 삼아 스탠딩 코미디를 하라면 저는 절대 못할 것 같거든요. 작정하고 웃기려고 하면 '가문의 영광'처럼 정말 망하지만, 슬금슬금 다가와 툭툭 건드리면 전성기 시절 '개그콘서트'처럼 박장대소 홈런이 터집니다.
박정민 배우는 찌질함을 숨기지 않고 도리어 무기로 삼아 보는 사람들을 웃깁니다. 한 장 한 장 읽다 보면 너무 찌질해보이는 그의 필력에 저도 모르게 피식거리고 있고, 이런 웃음을 주는 필력에 어느 순간은 존경심이 들 정도입니다. 마치 술자리에서 웃긴 놈이 썰을 풀기 시작하면 모두가 주목하고 기대하는 것처럼 책을 보게 됩니다.
오늘은 정말 활력이 필요했는데, '쓸만한 인간'을 읽고 나니 정말 글을 쓸만한 활력을 찾은 느낌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그래 맞아 나도 이 사람처럼 찌질했었지?'라는 공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부분일 테니 제외하더라도, '그래 맞아 나도 이 사람처럼 고뇌하고 번민하고 우울했지?'라는 공감은 깊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책 자체가 성장서사가 아니라 '그냥 우울했지만 그래도 잘 견뎠다.' 수준의 마무리들이라 너무 억지 부리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짧은 토막글마다 '다 잘될 겁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내일은 희망이 있겠죠 뭐.' 같은 실없는 위로를 하는데, 묘하게 잔잔한 울림이 있네요.
오늘도 저처럼 괜히 번민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분들이 계신가요? 괜히 그렇게 계시지 마시고 저랑 에세이 한잔하시죠. 저도 한마디 잘 들어드릴 테니 당신도 제 한마디 잘 들어주세요. 그렇게 한 마디씩 서로 말하고 듣다 보면 금세 편안해 질거라 봅니다.
그리고 뭐 인생 별거 있나요. 재밌는 거 보고 즐거운 생각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게 장땡이죠.
오늘 첫째가 유치원에서 집안 가훈을 써오라는 숙제를 받았답니다. 딱히 집안의 가훈은 없던 터라 가족들끼리 다양한 의견이 오갔는데, 정작 저는 '존중하기'라는 멋없는 가훈을 말했다면 우리 딸이 말한 가훈은 단순한데 참 멋있고 좋았습니다.
우리 딸이 정한 우리 집 가훈을 소개하며 마칩니다.
'잘 먹고 잘살기'
오늘도 모두들 잘 먹고, 잘 사셨기를 바랍니다. 오늘이 아니시라면 내일은 분명 그렇게 될 겁니다. 장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