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글이 조금 깁니다. 요약문이 아래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당신이 태어난 이유, 그리고 살아가는 이유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습니다.
귀족계급인 브라만으로 태어나 세속적 명예와 부가 예정되어 있던 싯다르타는 삶의 의미와 세상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고행의 길을 떠납니다.
친구 고빈다가 함께하는 진리를 향한 여정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문이 되어 거지꼴을 하고 하루 한 끼만 겨우 얻어먹는 생활을 할지라도 싯다르타는 사고하는 법, 기다리는 법, 단식하는 법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합니다.
그러나 구도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3년간의 구도 생활 속에서 깨달은 것은 배움으로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타마라는 부처, ‘깨달은 자’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와 함께 고타마를 찾아 설법을 듣게 되고 큰 감동을 느낀 친구 고빈다는 고타마의 제자가 되길 청합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에게 묻습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윤회의 법도와 깨달음을 통해 윤회를 초월하는 법도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의 경험은 온전히 스승님만의 것이니 제가 어찌 배울 수 있을까요?”
싯다르타의 질문에 현자는 빙그레 웃음 지으며 그 말이 맞다고 긍정해 줍니다. 그리고 싯다르타가 가려는 길을 진심으로 축원해 줍니다.
“그대의 가는 길 끝에 깨달음이 함께 하길.”
사랑하는 친구와 작별의 정을 나눈 싯다르타는 다시 수행의 길을 떠납니다. 어느 도시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강에서 나룻배를 모는 뱃사공과 인연을 맺기도 하죠.
도시에 도착한 싯다르타는 카마라라는 기생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맙니다. 그녀는 너무 현명했고 아름다웠고 친절했죠. 싯다르타는 빈궁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카마라에게 당신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묻죠.
카마라는 싯다르타에게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신발을 신으며 좋은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시라고 권하죠. 그리고 카마라는 도시의 부호인 카마스바비에게 싯다르타를 소개해 줍니다.
사고하는 법, 기다리 법, 단식하는 법 밖에 모르는 싯다르타였지만 속세의 방법들은 싯다르타가 알고 있는 것들에 비해서는 너무 쉬운 것들이었습니다. 카마스바비에게 돈을 버는 방법을 익힌 싯다르타는 금세 큰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되어 속세의 모든 값진 것을 누리게 된 싯다르타는 카마라의 마음도 얻어 부와 명예, 사랑까지 흠뻑 누립니다. 도박에 빠져 돈을 흥청망청 써버리기도 하고요.
어느덧 나이가 40이 넘은 중년이 된 싯다르타, 어느 날 잊고 살던 하나의 질문이 계속 머리를 맴돕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진리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덧없음을 느낀 싯다르타는 카마라와 마지막 정을 나누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구도의 길을 떠납니다. 도시를 벗어나 강가에 이른 싯다르타는 그를 도시로 이끌어준 뱃사공과 다시 재회를 하죠.
뱃사공은 싯다르타에게 강에게 질문하는 법, 강에게 듣는 법을 알려줍니다. 싯다르타는 자연 만물이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점점 깨달음에 길에 다가서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행복감에 젖어듭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현자 고타마의 열반을 축원하러 가던 카마라는 싯다르타가 있던 강가에서 뱀에 물려 죽게 됩니다. 카마라를 우연히 발견한 싯다르타는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합니다.
카마라가 죽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한 남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이 아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단숨에 알아차리죠. 어미를 잃은 아이는 갑자기 자신이 몰랐던 구도자인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됩니다.
아이는 버릇없는 괴팍한 아이입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온실 속에 자라났기 때문이죠. 싯다르타는 자신이 누리는 겸손한 행복을 전하고 싶지만 아이는 이를 거부합니다. 싯다르타는 기다립니다. 사랑이 전해질 때까지… 하지만 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저주하죠.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정부일지언정, 내 아버지로 인정할 수는 없다!”
싯다르타는 고민에 빠집니다. 이 아이를 내가 속박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뇌하죠. 그때 뱃사공이 말합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의 삶에 익숙한 저 아이에게는 당신의 청빈한 삶이 결박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 아이를 억지로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요?”
뱃사공의 말이 옳았습니다. 싯다르타가 경험한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을 그 아이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부질없는 것으로 이해시킬 수 없죠. 마치 싯다르타가 부처 고타마에게 던진 질문 “당신의 경험은 내 것이 아닙니다.”처럼 싯다르타의 경험은 그 아이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행복해도 그 행복을 아이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었죠.
얼마뒤 아이는 싯다르타에게서 도망쳐 도시로 갑니다. 싯다르타는 아이를 붙잡지 못하죠. 싯다르타는 아이를 잃은 상실의 슬픔보다 자아를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을 타인의 삶과 경험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브라만의 삶을 포기하고 구도의 길에 나설 때, 자신의 아버지가 슬프지만 붙잡지 못했던 이유를 이제 깨닫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랑했던 친구 고빈다를 재회한 싯다르타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친구에게 고백합니다.
“세상 만물이 나의 스승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도 숲 속 들짐승에서도 들판에 부는 바람과 풀에서도 배울 수 있다. 내가 가진 한 낯 보잘것없는 지식과 지혜는 세상이 알려주는 가르침에 비할바가 못된다. 나는 만물을 사랑한다. 만물이 내게 깨달음을 준다.”
[요약]
귀족인 싯다르타는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고행을 떠난다. 고행길에 '깨달은 자' 고타마에게 지혜를 구하지만 실망하고 여정을 계속한다. 도시에 도착해 카라마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도 부자 상인의 가르침을 받아 부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과 세상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다시 매달려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다시 뱃사공에게 귀의하여 청빈한 삶을 살아간다. 그 도중 카라마는 싯다르타의 아이를 남긴 채 죽음을 맞이하고 아이는 청빈한 싯다르타를 거부하고 떠나버린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싯다르타는 결국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사랑하는 친구 고빈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며 다시 명상에 잠긴다.
싯다르타를 읽는데 우연히 라디오에서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내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조용필의 노랫말들이 가슴에 깊숙이 와서 박힙니다. 나를 잃고 살았던 시간들, 세상에 저항하며 결투를 벌이며 살아왔던 부질없던 삶의 궤적들이 스치듯 흘러갑니다.
도대체 왜 살까요? 도대체 나는 왜 태어났을까요?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삶의 이유를 묻는 건 어쩌면 사치스럽고 너무 비현실적인 태도로 비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사람들에게 “이건 무슨 실없는 소리!”라는 핀잔을 들어도 할 말이 별로 없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사고하는 동물이고, 결국 사고하는 동물이 최종적으로 묻게 되는 질문은 ‘세상, 그리고 인생’이란 사실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건 어찌 보면 인간적 숙명입니다.
숙명적 질문에 대해 싯다르타와 바람의 노래는 이렇게 답합니다.
“인생은 수많은 경험의 축적일 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건 많이 없다. 그저 세상은 우리에게 수많은 가르침을 주는 사랑으로 가득 찬 공간일 뿐 하나의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하라.”
저는 이제껏 ‘나답게 살자!’라는 구호에 걸맞은 삶을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그저 세월이 이끄는 대로 남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왔죠. 그래서 진정으로 ‘나답다.’라는 것도 무엇이 나다운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온 저는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로 자라난 저는 바람이 불면 흔들렸고, 비가 오면 흠뻑 젖었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다른 사람의 그늘이 되어줄 수도 비가 올 때 안식처가 되어 줄 수도 없는 것처럼 남을 위해 산다는 저의 태도도 거짓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세상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요? 정말 저 다운 제가 될 수 있을까요? 싯다르타의 이야기에서 깨달은 것은 결국 경험한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흔들리고 위태로운 삶을 살았더라도 아직 살아만 있다면 그 경험은 내 뿌리가 됩니다. 이별을 당하고 슬픔에 잠기더라도 세월이 지나 아픈 감정들이 무뎌질 쯤이면 새로운 잎사귀가 자라납니다. 그렇게 나라는 나무가 세상에 조금씩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조용필의 노랫말처럼 언젠가 그런 날이 올 지 모릅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