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천부적인 재능이 있거나 신들린 자만이 시인이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선생께서 '시학'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사건을 직접 연기해 볼 수 있어야 하고 눈에 보이는 생생한 사건 현상을 묘사해야 하는데 이런 건 천재적인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것이죠.
우리들 모두가 대단하고 유명한 작품의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고요. 인간은 모방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우리는 훌륭한 작가들이 현실을 모방한 작품을 보며 즐거우면 그만입니다.
다만 궁금한 점이 있긴 합니다. 어떤 작품은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인기가 있는데, 또 어떤 작품은 재미없고 시간만 낭비한 것 같단 말이죠. 그럼 재미있는 작품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요? 이런 궁금증은 문학적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매우 흥미로운 궁금증입니다.
이런 궁금증에 대해서 예전 TV프로에서 김영하 작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언급하면서 대부분의 현대적인 문학적 글쓰기는 고대 그리스시대의 문학적 기초에서 발전한 것이라 말합니다. 할리우드의 극작가들이 아직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포켓북을 들고 다니며 참고하고 있다면서 말이죠.
그래서 저는 '좋은 문학작품들이 가진 공통점에 대해 '시학'을 보면 알 수 있겠네.'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책을 사고 보니 분량도 얼마 안 되더군요. 100p정도인데, 쓱 한번 보니 알기 어렵고 별 필요 없어 보이는 어문학 부분을 빼면 한 70p만 보면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시학'은 저를 이내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었고 머리를 쥐어뜯게 만들었습니다. 원래 '시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선생께서 대학강의용으로 집필하신 것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대의 수재들은 곧잘 알아들을 수 있었겠지만, 현대의 둔재인 저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해한 부분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시는 현실의 모방이다. 모방을 하고 싶어 하고 모방한 것을 즐기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모방을 통해 배우고 모방하는데 가장 뛰어나며 모방된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선율과 리듬도 인간의 본성이다. 이런 본성에 이끌린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시다.
2. 좋은 비극은 통일성, 필연성,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시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플롯을 통해 잘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인간의 보편성에 기초를 두고 각 사건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짜임새 있게 연결해야 좋은 비극이다.
3. 좋은 비극에는 반전, 인지가 있다. 반전은 상황이 돌변하는 것을 말하고 인지는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반전과 인지가 없는 플롯은 에피소드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형편없는 작품이다.
4. 나쁜 사람은 불행했다 행복해지면 안 된다. 착한 사람은 행복했다 불행해지면 안 된다. 평범한 사람이 실수나 결함을 통해 불행해지는 결말이 가장 좋다.
5. 갈등과 해결을 모두 잘 써야 훌륭한 비극이다.
위 다섯 가지 중 4번째, 주인공의 성격과 결말에 대한 부분은 사실 잘 납득이 가진 않습니다. '시학'이 비극을 주로 다룬 작품(희곡에 대해서도 선생님이 쓰셨다고 하는데 유실됨.)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결말은 거부감만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납득이 갑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불행해지는 결말도 그렇다니요? 비극은 원래 왕 같은 고귀한 신분인 사람이 운명 때문에 망가지는 게 국룰? 아닌가요?
물론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성격도 고귀하진 않죠.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 중 멕베스와 리어왕이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들인 건 아니니까요. 그러나 고귀한 신분이 망가지는 건 비극에서 좋은 설정임에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의 대리만족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착한 사람이란 '시학'에서 고귀한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제가 의역해서 착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고귀한 사람을 표현해 보자면 '마더 테레사' 수녀님 같은 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학'에서 비극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마더 테레사'와 같은 고귀한 분이 행복했는데 불행해지는 결론은 수많은 사람들의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요?
하긴 착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불행해지는 결말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은 연민을 넘어 분노를 자아낼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작품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해방감)를 선사해야 하는데 작품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열불이 난다면 분명 즐거운 경험은 아닐 듯합니다.
여하튼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의 '시학'은 현대의 문학이나 영화에도 잘 들어맞습니다. 가령 반전을 공개하는 부분에서 충분히 개연성(밑밥)을 깔아 둬야 한다던지, 주인공이 떡밥을 회수하는 장면은 직접 보여주는 방식이 아닌 관객의 추리에 의해 알게 만드는 것이 더 재밌다던지 하는 부분은 여전히 유요한 법칙들이죠.
다만 시를 잘 쓰는 법을 잘 안다고 해서 시를 잘 쓰기는 어렵습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영화평론은 언제나 날카롭고 명쾌해 훌륭하지만 나홍진 감독의 '곡성'과 같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어렵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도 좋은 연극 비평서를 만드셨지만 좋은 연극작품은 역사적으로 남기신 게 없는 것처럼 말이죠.
결론적으로 문학적 글쓰기를 잘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플롯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반전도 들어가야 하고, 주인공과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과 해결은 개연성과 필연성을 지키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사건이 전개되어야 하며, 대사의 명확한 전달을 위해 어학적 지식도 뛰어나야 한다.'
이게 일반적으로 가능한 부분인가요? 시나 소설, 영화, 연극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독자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가분들의 역량은 대단히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히 도전하진 않으려고요. 저는 그저 집에서 팝콘이나 주워 먹고 오징어나 뜯으며 잘 감상하려 합니다.
그럼 이만 총총(悤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