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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Jun 15. 2024

신중하게? NO. 직감적으로? YES!

[뇌는 어떻게 결정하는가], 조나 레러

어려운 결정은 직감적으로


집에 불이 났습니다. 주방에서 발생한 불씨가 삽시간에 거실로 옮겨 붙어 불의 기세는 곧 5살, 3살 배기 아이들이 있는 침실로 향할 것 같습니다. 거실 옷장에서 옷정리는 하고 있는 저는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저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거실의 불을 뚫고 신발장으로 달려가 소화기를 집어든다. 또는 아이들과 거실에 있는 방화실로 대피해 119에 신고한다. 이 두 가지 선택 중 아이들도 구하고 집안의 화재도 빨리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거실로 향해 소화기로 초기 진압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실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니 너무 무섭고 아이들의 겁에 질려 소리치는 상황까지 겹치니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아이들과 거실에 있는 방화문으로 피신해 119에 신고를 하고 구조를 기다리는 선택을 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아뿔싸, 방화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방화문 안쪽의 공간을 창고로 활용하며 이것저것 쌓아놓았던 물건들이 이제는 방화문을 막고 있습니다. 급한 마음에 방화문을 세게 당겨보고 발로 차보기도 하지만 방화문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과연 저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요?


우리는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이곤 합니다. 어떤 선택은 쉽게 내릴 수 있고, 또 어떤 선택은 너무 어렵죠. 그래서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다채롭고 복잡합니다. 모든 선택이 쉬운 선택이고 결정하기까지 풍부한 시간이 보장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려운 선택을 매우 빨리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곤 합니다.


공무원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지자체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있다면 직급이 높은 분들의 회의에 갑자기 끌려 들어가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제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는데요.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시청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분노한 시위대가 시청 안으로 쳐들어오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고, 시에서는 시위대가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 빨리 납득할만한 답변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때가 아마 점심을 먹고 오후 2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갑자기 팀장님이 급하게 저를 부르시더니 한 2~3분 정도 상황에 대해 설명하시곤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셨습니다. 뭔 일인지도 모르고 끌려들어 가듯 참석한 회의의 분위기는 엄중했습니다. 시위대의 주장은 법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그 주장을 시에서 들어줬을 경우 다른 단체들을 차별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 절대 시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죠. 그래서 경찰을 부르자, 시청입구를 막자와 같은 강경대응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다수였습니다.


공무원의 선택은 대게 법과 원칙에 의거해 이루어집니다. 근거가 없으면 하면 안 되고, 근거가 있더라고 차별이 될 수 있거나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 일부터 시행해야 하는 게 공무원의 일처리방식입니다. 그래서 주장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죠. "아니 왜 내 거는 안 해주는 거야!"라는 소리가 매일 들리는 곳이 시청 앞 광장입니다.


그런데 그날의 분위기는 좀 험악했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요구사항에 대한 시의 동의를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죠. 그래서 시 회의에서는 반작용으로 '그럼 우리도 강경하게!'가 주류를 이뤘던 것 같습니다. 시위대가 요구한 시간은 거의 10분밖에 남지 않았고, 강경론으로는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할 상황이었죠. 회의를 주관하시던 부시장님의 표정은 어두웠습니다.


그때 저는 감정적으로 화가 난 사람들에게는 더 화를 돋우는 행동은 하면 안 된다는 오랜 격언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강경론은 시위대를 더 자극할 뿐이었죠. 직급도 막내뻘이던 제가 섣불리 의견을 개진하기는 어려워서 잠자코 있었습니다만 강경론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강경론에서 말하는 반대를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늘공(늘 공무원)이 아닌 어공(어쩌다 공무원)이었던 제가 결국 총대를 매기로 결정했습니다.


"법적으로 말이 안 되는 주장이고, 다른 단체에 차별적인 주장인건 저들도 알지 않을까요? 갑자기 이렇게 강경한 시위분위기를 형성하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시위대의 지휘부들과 다시 한번 대화의 시간을 가지는 건 어떨까요?"


회의실 끝자락 있던 젊은 놈이 뭔 소리를 하나 한번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저를 무겁게 짓눌렀지만 그 자리에서 소수의견을 낼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무슨 꾸중을 듣더라도 일단은 말이라도 해보자 하고 던져본 것이죠.


그런데 부시장님은 그 말을 기다리셨던 같습니다. "그래 맞아. 저 말도 일리가 있어." 부시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강경론 일파의 회의 분위기가 일순간 바뀌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순식간에 시위대 지휘부에 협상안을 전달할 사람이 정해졌고, 회의시간과 장소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렇게 회의에서 제가 할 역할은 끝이 났고, 저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죠.


후일담을 들어보니, 부시장님은 일단 시위대가 시청으로 난입하는 최악의 사태는 피해야 한다는 입장이셨던 같습니다. 그래서 강경론을 주장하는 건 부시장님의 방침과는 다른 방향이었죠. 그리고 시위대가 그날 그렇게 험악했던 건 계속된 협의 과정에 지친 단체 회원들의 원성이 극에 달해 어쩔 수 없이 강경한 시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시위대 지휘부의 생각은 좀 더 대화를 해보자는 입장이었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내심의 생각들은 서로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날 시위대가 주장이 비합리적이니 우리는 합리적으로 대응하자고 결정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시위대가 갑자기 시청에 난입하고 이를 막으려는 경찰들이 달려오는 난장판이 펼쳐졌을 겁니다. 그런 상황이 펼쳐졌다면 그날의 일은 9시 뉴스에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죠. 회의를 주관하신 부시장님은 그 회의에서 위와 같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하시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강경론을 묵묵히 들으시면서도 크게 동의하시는 모습을 보이시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날 회의에 끌려들어 가면서 시위대가 뭘 주장하는지도 몰랐고 그 주장이 법에 맞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회의에 필요한 사전정보는 전무하다시피 했죠. 저는 그저 과장님이 출타 중이시고, 팀장님들은 모두 일정이 있으셔서 대타로 참석한 얼뜨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문뜩 생각나는 한 가지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일이 크게 번지는 건 막아야 한다


이것만 생각했더니 저도 모르게 손을 들게 되었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철업이 말한 주장이 회의에서 받아들여졌는지 그저 지금도 신기할 따름입니다. 저는 대차게 욕먹을 것을 각오하고 던져본 말이거든요.


이처럼 직감대로 한다는 건 얼치기의 급발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비합리적이고 신중하지 못하죠. 주장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냥 추측에 근거해 주장을 했습니다. ‘시위대가 저렇게 갑자기 저러는 건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주장은 그저 추측일 뿐 그렇게 합리적인 주장은 아니죠.


하지만 제 직감은 부시장님의 직감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고, 부시장님의 결정대로 일은 잘 풀렸습니다. 시위대 지휘부는 문제해결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부시장님의 중재안을 받아들였고 시위는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뇌 과학분야 전문 저널리스트인 조나 레러의 '뇌는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따르면 어렵고 빠른 결정이 필요한 문제일 경우에는 직감에 따른 선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옳은 결정을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큰 착각이라고 합니다.


비행기가 고장 나서 갑자기 추락하는 순간이 오면 조종사는 그동안 훈련받아온 대로 직감에 따라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때의 선택은 모든 물리법칙을 계산하고 비행기의 구조를 파악하여 신중하게 결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죠. 또 다른 예시로는 전쟁터의 군인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잘 훈련받은 군인일수록 전쟁터에서는 직감과 본능에 따른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적이 나에게 총알을 발사할 수 있는 순간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디에 엄폐를 할 것인지, 엄호사격은 어디에 해야 할 것인지 수류탄은 언제 던지고 어디로 돌격을 해야 할 것인지와 같은 무수한 판단을 해야 합니다. 이런 생사가 오가는 기로에 서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게 가장 생존확률이 높을까?' 따위를 계산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인간이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데 직감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직감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소하게는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를 때부터 직장을 고르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중요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동물입니다. 편의점의 가격표를 꼼꼼히 따지기 보단 그날의 취향에 따라 물건을 고르고, 연봉과 커리어를 신중하게 고려하기보다는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직장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결혼이야 당연히 사랑으로 하는 거니 지극히 비합리적인 행동이죠.(아닌가요?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다들 사랑하시죠? ^^;)


하지만 '모든 직감적인 선택들이 질 높은 훌륭한 결정들인가?'라고 반문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직감에 따른다고 급등주를 따라 샀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고, 지나가다 새로 생긴 음식점이 끌려서 주문을 하고 보니 사람이 먹을 음식이 아니었던 경우들도 종종 있으니까요. 즉 직감에 따랐다가 패가 망신하는 경우들도 왕왕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감은 우리의 훌륭한 무기입니다. 인간의 뇌 속에 있는 전전두엽이라는 부분은 우리 스스로의 감정을 판단하게 하고,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도록 종합적으로 명령하며, 과거의 경험과 기억들을 불러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의사결정과정 전체를 관장합니다. 그리고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은 우리의 행동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도파민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좋았던 것은 계속하도록 만들고 나빴던 것은 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이는 결국 우리가 실수하거나 실패했던 것은 다시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데 의미가 있죠.


따라서 우리의 직감능력은 계속 향상할 수 있습니다. 뇌와 호르몬의 작용에 따라 인간은 감정적으로 행동하되 계속 개선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계입니다. 오늘의 직감에 따른 의사결정이 실패로 끝났다면 전전두엽은 이를 기억할 것이며, 도파민은 이를 다시 하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을 것입니다. 또는 오늘의 직감적 선택이 옳았다면 전전두엽은 이를 성공사례로 간직할 것이며, 도파민은 다시 이런 행동을 하도록 응원하고 부추길 겁니다. 이렇게 우리의 직감에 따른 결정과정은 계속 발전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건 무수한 경험입니다. 그 경험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 경험은 우리의 뇌 속에 저장되어 우리의 거름이 됩니다. 어린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 매번 넘어지고 머리를 부딪쳐도 부모들이 계속 걸어보도록 응원하는 건 결국 그 아이들이 뚜벅뚜벅 잘 걸어 다닐 수 미래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많은 경험이 더 나은 직감적 판단을 내리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깨져보고 도전해 보아야 합니다. 되든 안되든 한번 해볼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수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예전보다 더 똑똑한 결정하게 된다면 우리의 인생도 좀 더 긍정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성공이 보장된 미래가 있다면 도전하지 않으실 건가요? 아이들이 깨지고 넘어져도 언젠가는 뚜벅뚜벅 잘 걸어가게 되듯이 우리들도 경험을 통해 인생을 뚜벅뚜벅 잘 걸어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이제는 한번 믿어보시죠. 우리의 밝은 미래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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