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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지 Apr 07. 2024

벼랑 끝, 그럼에도 꿈꾸고 싶다.


"어쩌다 이런 사고를 당했니?"

"아이고 속상해. 뭐 필요한 거 없어? 뭘 도와줄까?"

사고 후 처음 한 달은 친구들로 집이 웅성댔다.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할 수 없는 나의 불행에 그들은 가슴 아파하며 음식을 가지고 수선스럽게 드나들었다. 한 달이 지나자, 그들은 그들 삶으로 돌아갔다. 어쩌다 전화를 건 그들은 쇼핑을 갔다 왔다고, 등산을 갔다 왔다고,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점심을 먹고 왔다고 말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소소한 일상을 보낸 게 내게 죄지은 일인 듯 쭈뼛쭈뼛, 하지만 시시콜콜 말했다. 그들의 값싼 동정과 연민이 나를 더 비참하게 한다는 것도 모른 채. 그들의 생각지 않은 배려가 내 기분을 언짢게 했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딱히 쇼핑도 등산도 레스토랑도 다니지 않던 나였는데, 갑자기 그들에 의해 그들의 일상을 부러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 눈에 나는 점점 불쌍해졌고, 불편해졌고, 멀어져 갔고, 잊혀갔다. 내가 원했는지 그들이 원했는지 잘 모르겠다. 서걱거리던 불편한 감정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고 나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내가 웬 복으로 너 같은 바지런한 동생을 둬 좀 편해졌다 싶었는데, 내 팔자가 그렇지!”

날 동생처럼 여긴다던 가까운 이웃 언니는 나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생각하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녀의 대소사에 몸을 아끼지 않고 척척 도움 주던 나였다. 김장할 때는 앞장서 도와줬고, 한국에 잠시라도 다녀올 때면 그녀의 아이들 식사를 열심히 챙겼다. 내가 앞으로 그러지 못할 거라 생각해 그녀는 슬퍼했다. 그녀의 슬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했다. 쓸모없이 쭉정이만 남은 나를 그녀는 안타까워했다.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분명 내 자리였던 그녀의 옆자리에 다른 이가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서 가장 멀찍이 떨어진 구석 자리가 날 위해 남아있었다. 내 자리를 확인한 날 서러움과 배신감에 홀로 목 놓아 울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스며드는 방 안에 홀로 지내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계절은 한여름을 향해 치닫는 데 마음은 외로움으로 시렸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했던가? 사람들의 걱정과 발걸음으로 분주했던 집이 한 달 반이 지나자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따뜻하고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고, 난 오지 않는 그들을 기다리다 울음을 삼키는 날이 늘어갔다. 깊숙한 외로움을 걸치고 영겁과 같은 시간을 오롯이 견뎌야 했다. 늦은 밤 혼자 술을 퍼마시고 짐승처럼 소리를 질러보았다. 접시를 바닥에 무참하게 던져 보고, 긴 머리를 가위로 싹둑 잘라 보았다. 그렇게라도 하면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난 고통과 창자를 뒤트는 속 쓰림만 속절없이 찾아왔다. 아이들이 있어 쉬이 아파할 수도 없었다. 아픔을 혼자 삼켜야 하는 날이 늘어갔다. 


'나처럼 재수 없는 여자가 또 있을까?'

하루아침에 난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여자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혼자만 열심히 사는 척 나대더니 꼴좋다. 혼자 씩씩한 척하더니 그럴 줄 알았어. 이젠 네가 그 몸으로 뭘 더 할 수 있겠어. 이젠 그만하고 애들이나 챙기고 살아.' 

자격지심이 꼬일 대로 꼬인 칡넝쿨처럼 솟아 나를 휘감았다. 부러진 날개를 부여잡고 속삭였다. 

'이 몸으로 뭘 더 할 수 있겠어. 내게 맞는 커리어가 뭐가 있겠어. 마흔이 된 이 나이에 언제 다시 학교를 지원해 들어가. 나도 할 만큼 했잖아. 이대로 주저앉는다고 누가 나를 뭐라 해.'

사실 완벽했다. 누구도 나를 비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날개가 없는데 어쩌라고.      

내가 나를 위로하려 혼잣말을 해봤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구멍 난 문풍지를 더듬는 겨울바람처럼 자책하는 말들이 마음을 에였다. 제대로 날아보려고 한 적도 없으면서, 이젠 날개가 없어진 탓을 하며 주저앉을 준비를 하는 내가 비겁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은 해 봤나? 적당히 인생의 거래를 하며 무덤덤하게 산 건 아닐까? 내가 내 인생에 과연 날아 본 적은 있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돌이켜 보면 20대엔 터질듯한 열정과는 다른 현실로 많은 방황과 시행착오와 헛발질을 하다 날개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결혼을 서둘러했다. 그러다 30대는 아이들의 엄마로, 아내로, 그리고 며느리로 살았다. 짬짬이 나의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어 대학에 강의도 나가고 미술학원도 했지만, 대부분 내 삶은 내가 아닌 가족들의 삶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살았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았고, 그렇게 사는 게 마음 편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해도 늦지 않아. 내 날개는 잠시 접어두는 것뿐이야.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다 이렇게 사는 걸 뭐.' 

생각해 보니 난 날개를 펴 날아본 적도 없었다. 이민 온 후로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꿈꾸는 건 사치였다. 어딜 가나 주눅이 들었고 편견과 차별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어깨 한번 펴보질 못했다. 억울했다. 날개를 펴 볼 수조차 없었던 내 삶이. 어찌 보면 내 삶은 가족과 사회가 용인하는 것에만 매달려, 세상 탓을 하며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날개 한번 펴 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막내니! 에구, 세상에 뭔 일이다냐. 어쩌다 네가.”

전화기 너머 한숨 섞인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목소리는 쭉정이만 남은 나뭇가지처럼 서걱거렸다. 눈에 힘을 줬지만 이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꼭꼭 눌러뒀던 서러움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친정 언니들에게 엄마한테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해 뒀었다. 어떻게 소식을 아셨을까. 육 남매의 막내인 난 엄마에게 큰 자랑이었다. 엄마는 농사와 살림에 고된 삶에도 늦둥이인 나를 한없이 아끼고 예뻐하셨다. 서모 밑에 자라 어려서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한 엄마는 학교 근처에 가본 적 없는 까막눈이다. 그런 엄마에게 서울에서 공부해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막내딸은 시골 작은 마을에 자랑이자 엄마의 못 배운 한과 무시당한 설움을 채우고도 남았다. 그런 막내딸이 그것도 캐나다라는 거리가 가늠조차 안 되는 먼 곳에서 다리를 다쳐 앞날을 모른다니 팔십이 다 된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걸까? 엄마의 목소리는 금세라도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걱정되거든, 말만 하지 말고, 교회든 성당이든 가서 날 위해 기도해 줘 엄마.”

신이 다 늙어 껍질만 남은, 무지해 신이 뭔 지조차 모르고 산, 꾀 없는 노인네가 매달리면 좀 들어주지 않을까? 얄팍한 셈이 들었다. 천지에 엄마만큼 간절하게 날 위해 기도해 줄 이가 있을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엄마에게 뭔가 막내딸을 위해 했다는 위안거리를 주고도 싶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나 보다.

“엄마가 여기 동네 사돈네 따라 교회가 네가 말하는 하나님인지 뭐신지한테 기도하고 왔응께, 우리 막내 빨리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왔응께, 니 금방 나을겨.”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고,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어 툭 내뱉었지만, 엄마가 교회에 가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까막눈인 엄마에게 성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는 교회라는 장소가 얼마나 낯설고 불편할지 알기에. 내가 캐나다에 와서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이곳에서 공부하며 항상 이방인이었다. 과에서 영어를 제일 못하는 나이 많은 유일한 동양인!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나의 정체성이었다. 내게 뭐라 하는 이가 없어도 늘 기가 죽어 눈치를 봐야 했다. 내가 그랬듯 남들 눈치 보며 교회에 앉아 있었을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했다. 더군다나 사돈이라면 엄마를 까막눈이라고 늘 얕잡아 보던 이가 아닌가? 막내딸을 살리고자 했을 엄마의 간절한 발걸음이 꼭꼭 닫아뒀던 마음에 종을 울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아이가 학교에서 풍선을 가지고 왔다. 걷지는 못해도 앉을 수 있게 된 나를 보며 아이는 풍선을 가지고 놀자고 보챘다. 짠한 마음에 그러자고 애써 침대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아이는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조심스럽게 풍선을 날려 보냈다. 나도 가만가만 풍선을 천장으로 올려 보냈다. 아이가 맑게 웃으며 풍선을 따라갔다. 나도 저 풍선처럼 날 수 있을까? 풍선이 되고 싶어졌다.      

두 달이 지날 무렵, 일찍 돌아온 남편이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아오더니 수건으로 내 온몸을 닦아줬다. 그의 손길이 너무 아깝도록 정성스러워 목이 멨다. 그동안 나를 매몰차게 대한 미안함이 그의 손이 지나는 자리마다 깊게 묻어났다. 수술로 핏기 없이 늘어진 내 다리를 그는 강아지처럼 핥으며 슬퍼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힘들고 마음 아파하고 있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린 그날 서로를 위로하며 사랑을 확인했다. 창으로 내려앉은 여름 햇살이 따뜻하게 그와 나를 덮어줬다. 

     

“엄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걸어봐”.

“헉헉헉, 휴우~. 알았어. 조금만 쉬다 하자!”

초겨울 찬바람이 얼굴에 땀을 씻어줬다. 작은 아이랑 큰아이가 목발을 짚고 겨우 한 발씩 걸음을 떼기 시작한 날 응원 해줬다. 아이들이 돌 무렵이 되었을 때, 한발 두발 세상을 향해 서툰 걸음마를 시작하던 때가 겹쳤다. 나도 나의 세상을 향해 힘들지만, 한 발씩 조심스레 발을 내뎠다. 이웃들은 반년 넘게 보이지 않다 양손에 목발을 짚고, 한 발엔 터미네이터 같은 보조 부츠를 신고, 절룩거리며 걷기 시작한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웃어줬다. 연민에 찬 그들의 웃음에 바늘에 찔린 듯 따끔했지만 괜찮았다. 전처럼 심하게 아프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걸음을 뗄 때마다 수술을 견딘 왼쪽 다리에 강력한 전기가 도는 듯 찢어질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지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걷고 밤에는 쓰러져 잤다. 내게 걸음을 떼는 건 잃어버린 날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목발의 지지대가 닿은 어깨 안쪽에 피멍이 들더니 굳은살이 생겼다. 그럴수록 걸음은 더 빨라지고 견고해졌다. 걷는 게 조금 익숙해졌을 때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물리치료사에게 배운 대로 매일매일 물속에서 다리를 단련시켰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겨드랑이 굳은살 안쪽이 며칠째 근질거렸다. 몰랐다. 날개가 다시 돋으려는 것인 줄. 벼랑끝에 서니 날고 싶어졌다. 새롭게 시작할 힘이 생겼다. 교사 말고 내 몸으로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전에 다녔던 대학에 전화해 입학 상담사와 예약을 했다. 상담사와 만나기로 한 전날, 걱정과 설렘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제가 갈 수 있는 과가 뭐가 있을까요?”

상담사를 만나 갈 수 있는 과들을 알아보았다. 나의 상황을 설명한 뒤 최대한 맞는 커리어를 할 수 있는 전공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상담사는 몇 가지 과들과 가능한 커리어들을 설명해 줬다. 경리직, 병원 사무직, 그리고 소셜 워커 등의 프로그램을 소개해 줬다. 소셜 워커라는 말을 듣자마자 궁금한 마음에 입학 자격과 어떤 커리어가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상담사가 소셜 워커 프로그램을 하면 카운슬러나 클리니션으로 커뮤니티 프로그램이나 병원에서 일할 수 있다고 설명해 줬다. 주로 앉아서 하는 커리어라 내게 잘 맞을 거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불현듯 병원에서 내게 빛이 되어줬던 소셜 워커가 떠올랐다. 소셜 워커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내가 운명처럼 간절한 바람이 생겼다. 그녀처럼 나도 도움이 절실한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고 싶어졌다. 목표가 생기니 더 이상 비참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균형을 잃은 다리로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큼은 꿈으로 균형을 잡아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만치 겨울이 달아나고 있었다. 봄을 재촉하는 바람이 온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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