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지 Apr 21. 2024

엄마 인싸야? 내가 제일 잘 나가!



"엄마 인싸였어?"

내 대학원 졸업식에서 큰 아이가 환한 웃음을 달고 말했다. 그 말이 재밌기도 하고 생경하기도 했다. 내가 아이 눈에 인싸로 보였다니. 과동기들에 둘러싸여 사진을 찍고, 교수님들과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고, 허그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내 모습이 신기했나 보다. 젊은애들은 인싸에 신경을 쓰니 단박에 잘 나가는(?) 엄마를 눈치챘나 보다. 오랜 공부를 하며 인싸가 되려 노력한 적도 없고 스스로 인싸라 생각한 적도 없다. 외톨이를 자청하며 살았다. 그래도 아들눈에 그렇게 보였다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내 졸업식에 두 아이가 나보다 더 신나 들떴다. 


"Hey, baby, look at here!"

큰 아이가 과동기들과 사진찍는 내게 장난을 건다. 아이의 장난에 교수님과 친구들 모두가 웃는다. 50살이 넘어 외국에서의 오랜 공부를 잘 마친게 감사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때 유치원과 초등저학년이던 두 아이가 내 졸업식에 사진을 찍어주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작은아이와는 같은 해에 같은 학교를 입학했다. 아이는 대학을 난 대학원과정을. 매주 금요일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아이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린 신입생으로 정보도 나누고 공부팁도 나누고 힘든점도 함께 나눴다. 내 인생에 아이와 나란히 신입생이 되고 동문이 될 줄은 꿈조차 꾸지 않던 일이었다. 길고 외롭고 막막한 길을 끝까지 완주한 스스로가 대견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공부하는 게 편한 난 늘 아웃사이더였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나의 정체성에 스스로 왕따의 길을 걸었다.  굳이 어떤 그룹에 속해야 한다거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스스로 거부했다. 왜냐면 그래야 덜 상처받고 갈길을 갈 수 있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를 force 하기보다 스스로 외로운 길을 걸었다. 어딘가에 속하고 인정받으려 쏟는 에너지를 공부하고 아이들 키우는데 집중했다. 생김새나 영어나 나이 때문에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을걸 알았기에 애당초 인정받길 포기했다. 처음엔 힘들었다. 남들에게 계속되는 무시와 차별, 혹은 투명인간같이 nothing처럼 취급받는 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런대로 괜찮았다. 오히려 인간관계에 쓸데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쓸 일이 줄어 나와 아이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전문대와 대학땐 동양인이 나 혼자인 경우가 많았다.  Social Work이 말로 하는 직업이다 보니  어딜 가나 동양인이 적었다. 전문대는 30명 중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대학은 앨버타주에 있는 캘거리대서 했는데 76명 중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영어는 젤 뒤처지는데 나이는 제일 앞섰다. 전문대땐 수업 끝나기 바쁘게 아이들 픽업을 가야 했다. 어린아이들이 있다 보니 과동기들과 어울릴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상황이 이런지라 자의 반 타의 반 난 늘 아웃사이더였다. 


그러다 UBC 대학원에 오니 나름 오랜 기간 공부해 내공이 쌓인 데다, 현장경험이 남들보다 풍부하고, 클래스 사이즈가 작다 보니, 과애들이 나의 퀄리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전문대와 대학에 비해 과동기들이 사회생활 몇 년씩은 하고 들어와서인지 인간에 대한 이해나 통찰력도 있었다. 나 또한 오랜 학교생활에 맷집이 생겨 뻔뻔함과 무심함이 안전장치처럼 장착되어 토론이나 발표를 학부 때보다 편하게 할 수 있었다. 기죽지 않고 눈치 보지 않으니 반전이 일어났다.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동기들이 먼저 연락처를 물어보고 도움을 청해왔다.


"네가 젤 앞에서 당당하게 묻고 질문하는 모습을 보며 보기 좋고 부러웠어.  나는 영어가 모국어인데도 긴장해서 못 물어보는데." 

지금은 베프로 지내고 있는 한 대학원 동기가 말했다. 시력이 나쁘기도 하고, 앞에 앉으면 눈에 거슬리는 게 없어 맨 앞줄에 앉는걸 개인적으로 좋아했다. 사실 나도 물어보거나 질문에 대답할 때는 긴장했다.  하지만 수업 끝나고 바로 직장으로 가거나 혹은 집에 가서 저녁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따로 동기들이나 교수님께 시간 내 물어볼 짬이 없었다. 수업시간에 최대한의 정보를 받아야 했기에 남 눈치 볼 여유가 없었다. 영어로 해야하는 공부나 일은 전이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영어는 내게 매일매일 해야 하는 숙제이고 평생을 해도 끝나지 않을 숙제다.  


대학원은 약 34명 정도의 동기들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5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직장을 다니지 않았다. 다들 공부하기 위해 휴직을 하거나 그만둔 상태였다. 난 아이들이 있는지라 매달 일정한 소득이 필요했고, 나름 시간관리 요령을 터득한 터라 일단 학교를 다녀보고 결정을 하려고 했다. 주위 친구들 중 이미 학위를 마친 친구들은 입모아 힘들 거라며, 직장을 그만둬야 할 거라고 했다. 더구나 난 살림도 해야 하고 애들도 있으니. 하지만 해보니 할만했다. 오히려 캘거리대학보다 수월했다. 미라클 모닝을 충실히 실행했다. 새벽 세네시쯤 일어나 공부하고 수영장에서 운동은 무조건 했다. 모든 수업을 주 2일에 몽땅 몰아넣었다. 학교도 멀고 직장을 다녀야 해서. 공부는 체력이 따라줘야 해서 운동뿐만 아니라 홍삼과 음식을 열심히 챙겨 먹었다. 


내가 머리는 좋지 않은데 요령은 잘 터득하는 편이다. 공부도 기술의 영역인지라 기술이 눈에 띄게 늘어갔다. 논문을 읽을 때 다 읽지않아도 중요부분을 바로 캐치할 수 있는 기술이 생겼다. 그래서 과제를 늘 일찍 제출할 수 있었고 모든 과목을 과동기들보다 먼저 끝낼 수 있었다.  보통 8월 말 여름학기까지 대학원 과정을 마치는데, 4월 초에 모든 과목을 다 끝내고 제일 먼저 필드에 취업해 나갔다. 교수님들께 학점을 미리 달라고 한 다음, 학부 어드바이저에게 Letter of Completion을 받아 지금의 공공기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속한 공공기관은 BC주에서 가장 큰 공공기관중 하나로 지역사회의 모든 종합병원, 양로원, 보건소, 재활치료센터, 커뮤니티건강프로그램들을 관장한다. 


나는 클리니션으로 지역사회 의사들과 커뮤니티에서 일하고 있다. 연봉은 전에 다니던 비영리기관에 비해 두 배 이상 받고 베네핏도 좋다. 입사첫해부터 4주 유급휴가에 병가도 많다. 근무년수에 따라 2달까지 유급휴가가 가능하다. 공무원연금에 정년이 보장된다. 4시 30이면 칼퇴근이라 삶과 일이 균형 있는 워라밸이 가능하다. 참고로 캐나다는 공무원연봉이 한국과 다르게 높은 편이다. 첫해부터 연봉 칠천에서 팔천만원으로 시작하는 직군이 많다. 보통 4년제를 졸업하고 전문직공무원이 될 경우 5년 이상 일하면 일억 이상의 연봉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일하는 헬쓰케어쪽은 단순사무직이나 경리직을 제외한 간호사, 소셜워커, 재활치료사, 헬쓰코치, 물리치료사, 카운슬러의 연봉은 몇 년만 지나면 1억은 넘는다. 물론 이곳은 버는만큼 세금도 많이 낸다. 


"얘들아 얘들아! 엄마가 수영장 며느리에서 수영장 딸이 되었어!" 

얼마 전 수영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내가 아이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뭔 소리냐고? 난 수영장 한국 할머니들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게 되었다. 며느리 대하듯 매의 눈으로 나를 못마땅해하던 그녀들이 꿀 떨어질 듯 사랑 가득한 끈적끈적한 눈길로 나를 대했다. 서릿발 서린 눈으로 내게 다소곳하게 앉으라며 구박하고, 김치는 직접 담궈야한다며 잔소리하던 그녀들이 나를 딸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의 공공기관에서 일하면서부터다. 우리 프로그램에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라 영어가 힘든 할머니들은 내가 취직이 된 것만으로 본인들의 안위가 보장된 듯 행복해하며 좋아했다. 


그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나중에 나 아파서 요양원 같은 곳이나 정부노인주택 가려고 할 때 좀 알려주고 도와줄 수 있지?" 

"당연하죠. 제가 아는 부분에 대해서는 리퍼럴도 해드리고, 정보도 알려드릴게요". 

할머니들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내가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했다. 

이거 뭐지? 좀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할머니들 사이에서조차 난 인싸가 되어 버렸다.


많은 이들이 '인싸'가 되기 위해 애쓴다. 내 경험으로 인싸는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난 우리 아이들에게 말한다. 

 "don't force yourself to fit in where you don't belong".  

우린 남들에게 우릴 맞춰서라도 어딘가에 속하려 애쓰며 산다. 우린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혹은 인정받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산다. 물론 좋은 친구들이 있고  많은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자기 지신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잘 맺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난 생각한다. 관계는 변하기 나름이고 나의 노력과 다르게 흐를 수 있는 게 관계다. 나와의 관계는 내가 온전한 컨트롤을 갖고 있다. 나만 나한테 진심이면 된다. 


혹시라도 본인이 아웃사이더라고 혹은 왕따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기죽지 말고 본인의 길을 꿋꿋하게 가셨으면 좋겠다.  본인의 멋짐을 개척하며 본인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하며 갈길 가면 좋겠다. 괜히 나와는 맞지않는, 나를 소중히 대하지 않는 이들과의 관계에 휘둘리며 에너지나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남들이 나를 정의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내가 나를 '멋진 나 & 괜찮은나'로 정의하며 나답게 살다 보면  어느샌가 '괜찮은 나'를 알아봐 주는 친구들이나 주변인들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우매한 그들이 못 알아봐도 괜찮다. 나 스스로가 '괜찮은 나'를 알아보고 나와의 소중한 관계를 쌓았을 테니까 밑질게 없다.


"I am the happiest woman in Vancouver!"

내가 나를 밴쿠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정의 내렸다. 내가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가끔 하는말이다.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에, 날 믿고 지지해주는 남편에, 다양한 좋은 친구들에,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직업과 가슴설레는 미래의 꿈까지 있으니 말이다. 


인생, 생각하기 나름이다. 난 내 방식대로 내 뜻대로 산다는 'On my terms' 란 말을 좋아한다. 내 뜻대로 세상을 정의하거나 바꿀 힘이 내겐 없다. 하지만 나를 정의 내릴 힘과 권한이 내겐 있다. 나 자신이라도 나의 방식대로 나를 규정하며 살고 싶다. 남의 눈치보지 않고.  다시 한번 말해본다. 

"내가 제일 잘 나가!"





이전 07화 팀홀튼 커피도 못 시키던 아줌마가 UBC대학원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