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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지 Apr 14. 2024

팀홀튼 커피도 못 시키던 아줌마가 UBC대학원을!


삶은 예측이 어려워 막막하다. 그래서 힘들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팔자에 없던 오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40대 후반에 대학을 졸업하고 50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의지할 일가친척이 없는 곳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며. 물론 대단한걸 한건 아니다. 하지만 커피주문조차 덜덜 떨던 나였기에 생각지 않은 인생반전이었다.   


내겐 커피주문이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민 초기 팀홀튼에서의 커피주문은 심장이 쫄깃해질 만큼 떨리는 도전이었다. 사실 커피숍이라는 곳에 잘 가지도 않았다. 어쩌다 가더라도 어물쩡거리며 일행 중 누군가 먼저 나서주길 바라는 소위 ‘영어울렁증’이 있었다. 어쩌다 주문을 할 때 직원이 내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 "pardon?" "sorry?"라고 되물으면 심장이 벌렁거리며 말을 더 버벅됐다. 속으로 되뇌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아 끙끙대던, 소심하기 그지없던 아이 둘을 둔 아줌마였던 나! 그랬던 내가  캐나다에서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40대에 전문대와 UofC (University of Calgary) 대학을 졸업하고, 50에 UBC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대학원에 입학했다. 내 인생에 전혀 계획되지 않은, 아니 꿈조차 꾸지 않던 일이었다.  


“넌 공부시켜 주는 남편이 있겠지? 부모가 있거나?” 

"좋은 남편 뒀지? 외조해 주고 애도 봐주는."

“넌 영어를 좀 했겠지? 아님 젊어서 외국경험 좀 한 거 아냐?” 

“혹시 네 애들이 영어라도, 숙제라도 봐준 거겠지?” 

공부할 때 자주 듣던 질문들이다. 주변인들은 한결같이 내가 공부할 수밖에 없는 나도 모르는 이유들을 만들어냈다. 나 또한 그랬다. TV에서 비치는 혹은 주변인들 중 외국서 공부해 자리를 잘  꿰찬이들은 나와 출발점이 다르다 생각했다. 그들은 애당초 부모를 잘 뒀거나, 젊어 외국경험을 했거나, 혹은 그들의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겠지라고 믿었다.  


난 외국경험이 전무하다. 이민오기까지 캐나다가 유일하게 와본 외국이었다. 한국 대학시절엔 학비를 벌며 공부하느라 외국여행이나 어학연수는 꿈도 꿔보지 못했다. 결혼 후에도 남편의 도움은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다. 내게 짐만 더 얹어주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민 온후 내가 전문대를 다니는 동안 그는 거듭되는 취업실패로 무력감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본인 돌보기도 힘들어했다. 사실 전문대가 학부나 대학원 과정보다 훨씬 힘들었다. 외국서 처음 들어간 대학이고, 아이들도 어렸고, 영어도 경제적인 상황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비빌언덕이 없었다. 그나마 남편이 도움이 된 건, 후에 그가 다른 주에 직장을 갖게 되어 멀리 떨어져 산거정도다. 손이 많이 가는 남편이 곁에 없는 게 나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내 경험으로 공부는 누가 시켜줘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물론 경제적인 부분이 발목을 잡을 때가 있긴 하다. 경제적인 도움이 있다면 좀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나 같은 경우는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적이 없다. 직접 학비와 용돈을 벌어야 해서. 캐나다는 한국에 비해 학자금과 장학금 제도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나는 전문대는 성적을 잘 유지해 따로 학자금대출 없이 장학금을 받고 다녔고, 대학과 대학원은 직장을 다니며 마쳤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지라 학교만 다닐 처지가 못되었다. 내가 버는 소득과 정부의 학자금 대출로 두 아이를 키우며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다행인 건 아이들이 어려 크게 돈 들어갈 일이 없었다. 따로 학원에 보내지 않고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운동만 시켰는데, 시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들이라 비용이 얼마 들지 않았다. 


"아니,  그 오랜 공부를 어떻게 했어요? 혼자서 아이 둘 데리고?"

"그냥 했어요."

가끔 지인들이 묻는다. 난 머리도 빠릿빠릿하지 않고, 영어도 시원찮고, 지름길도 모르고, 줄도 잘 못서고, 백도 없고, 나이도 솔찬고, 아이들도 있는 엄마인지라,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부단하게 했다. 일가친척 없는 이곳에서 누구의 도움 없이 내가 아이 둘을 데리고 대학과 대학원을 잘 다닐 수 있었던 건 ‘그냥 한 거’다.  ‘그냥 한 거’라는 게 뭔 소리냐고? 그냥 딴생각 안 하고 했다는 거다. 힘든 적도 많았지만, 단 한 번도 ‘포기해야겠다’ 아니면 ‘좀 더 쉬운’ 길을 가야겠다고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부단하게 하루하루 해야 할 것을 하며 살았다. 너무 클리셰 하다고? 근데 진짜다. 딱히 맘먹고 대학원까지 가겠다고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다. 그래서 목표를 크게 세우지 않았다. 그저 그날그날의  일상과 부지런한 사랑을 했다. 


"영어도 그렇고, 경험도 없고,  여기서 일하시기는 좀 힘들 거 같네요."

이민 온 해 스시집에 면접을 봤다 떨어졌다. '나의 영어는 이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짧게 일이 년 공부라도 해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둘을 데이케어와 학교에 보내고, 2년 정도 짬짬이 영어공부와 봉사활동을 했다. 운 좋게 면접과 서류접수를 통과해 공립 전문대의 유아교육과를 들어갔다. 한국에서 주로 가르치는 일을 했던지라 교육자가 되기로 뜻을 품고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생활 1년도 되지 않은 어느 날 건물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고 1년 동안 수술과 재활치료기간을 보내야 했다. 수술의사가 서있을 일이 많은 교육 쪽보다는 앉아서 할 수 있는 커리어를 찾아볼 것을 권했다. 


컬리지 카운슬러와 상담 후 나는 공립 전문대의 Community Social Work 과정을 준비해 들어가게 되었다. 악몽 같았던 병원에서 한 소셜워커의 친절과 따뜻함에 난 감동했고, 그녀 같은 소셜워커가 되고 싶어졌다.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았다. 4년제는 어린 아들들을 키우며 해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더글라스컬리지를 들어갔다. 과애들이 대부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애들인지라, 이민자에 대한 이해심도 관심도 배려심도 없었다. 시험과 발표는 왜 그리 자주 있는지. 아이들을 저녁 9시에 재우고, 12시까지 공부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다시 공부를 해야 그나마 따라갈 수 있었다. 대학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을 데이케어에서 데려와 밥을 먹이고, 책을 읽어주고, 수영이나 농구를 데리고 다니느라 저녁 9시까지는 따로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미래의 꿈이 있어서였을까? 하루하루가 전쟁 치르듯 바빴지만 나름 할만했다. 


학교에서의 공부는 쉽지 않았다. 영어보다 힘든 건 과 아이들의 차별이었다. 과목마다 그룹프로젝트가 있는데, 아이들은 나와 그룹이 되는 걸 꺼려했다. 토론이나 정보를 나눌 때도 본인들끼리만 말하고 결정을 내렸다.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내 영어 소통에 애들이 답답할 수 있고, 그 애들과 나이차도 많고 하니 자기들끼리가 더 편하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수업을 끝내고 나오며 서러움과 모멸감에 여러 번 울었다. 어떤 과에는 나보고 Learning Centre라는 곳에 가서 도움을 받아보라 권하기도 했다. 영어가 부족하니 공부도 못 따라갈 거라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난 2년 동안 한 학기만 빼고 Honor Roll이었고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한국인 특유의 시험에 강한 유전자 덕분이었다. 


이곳은 비가 많이 오고, 곰도 많이 나타나는지라 어린 막내아이를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텅 빈 운동장에 놓고 갈 때면 걱정스러움과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찡했다. 대학교 수업이 8시 30분에 시작하는지라, 아이를 8시에 학교에 놓고 달려가야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여러 해 동안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 픽업을 가지 못했다. 아이는 학교 끝나고 데이케어에서 엄마를 기다리거나,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혼자 걸어 다녔다. 감사한 게 아이들이 크게 아픈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며 단 한 번도 결석이나 지각한 적이 없었다. 


전문대 졸업 후 이민자와 난민을 돕는 Employment/Settlement Counsellor로 어렵게 취직이 되었다. 파트타임에 차로 편도 1시간 30분을 운전해가야 했지만, 회사에서 모니터를 켤 때마다 설렜다. 40이 훌쩍 넘어 캐나다에서 처음 힘들게 갖은 직업이라 감사했다. 일하는 동안 자투리시간을 활용해 필드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고 봉사를 했다. 이곳 생명의 전화 (Crisis-Line)에서 1년 넘게 상담봉사를 하고, 노숙자센터에서 짬짬이 급식 봉사와 난민들을 돕는 멘토로 활동하며 여러 현장에 필요한 경험과 지식을 익혔다. 


Social Work은 다양한 분야의 소외된 계층과의 경험을 중요하게 보기에, 난 경험도 쌓고, 부족한 지식과 스킬을 쌓기 위해 봉사뿐만 아니라 On-call 잡도 틈틈이 했다. Behavioural Interventionist와 초등학교에서 일하는 School Aged Worker라는 직업도 On-call로 했다. On-call은  내가 시간이 날 때 하면 되기에,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간다던지 혹은 주중 오후에 한번 정도 출근을 했다. 그러면서 UofC로 대학 편입을 준비했는데, 운 좋게 합격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카운슬링 코스를 들으러 일주일 다녀오는 것 말고, UofC는 모든 게 온라인으로 진행이 되었고, 커리큘럼도 진보적이라 새로 배우는 게 많고 훌륭했다.  주 4일 일하며 풀타임 공부를 했다. 한창 손이 가는 아이들이 있어 만만치 않았지만, 나름 시간을 잘 짜서 2년 안에 마칠 수가 있었다. 제일 곤란했던 건 캘거리 시간이 밴쿠버보다 빨라  일주일에 2번 이상은 한두 시간 일찍 퇴근해야 온라인 수업에 접속할 수 있어, 2년 내내 알게 모르게  상사들과 팀원들 눈치를 봐야 했다. Vacation hours로 처리는 했지만, 이해해 준 상사들 덕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근무시간엔 더 열심히 일하고 팀에 도움이 되려 애썼다. 전문대에서 공부나 학교생활에 맷집과 요령이 생겨서인지 대학은 전문대에 비해 수월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부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졸업 후 나는 Social Work 라이센스를 준비하며 대학원 준비를 했다. 캐나다는 Social Work이 Regulated 된 커리어라 4년제 대학 졸업과 함께 exam을 봐서 라이선스를 취득해야 한다. 난 정부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대학원을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어가 현지인들에 비해 부족하니 학벌로라도 경쟁력을 높여야 했다. 그리고 이곳 병원이나 정부 공공기관의 대부분 Social work 포지션들은 석사이상의 자격을 요한다. 난 그동안의 경력과 봉사활동, 그리고 리서치 proposal을 차근차근 준비했고, 감사하게  UBC 대학원에 합격하게 되었다. 


돌아보면 악몽 같던 사고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아마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난 유치원교사를 하고 있었을 거다. 사고 이후 내겐 선택할 수 있는 커리어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간절함이 생겼다. 그 간절함이 나를 앞만 보고 나아 가게 했던 것 같다. '부단하게'라는 말을 아끼고 좋아한다. 나 같은 흙수저에게는 소중한 인생의 가치다. 인생이 내 뜻과 다르게 흘러갈 때가 많지만, 내가 나를 배신하지 않고 셀프퇴장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나의 길을 뚜벅뚜벅 갈 수 있는 미련함이 있으면 된다. 


혹시라도 누군가 망설이고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그냥 하면 된다고". 한 달이 걸리든 일 년이 걸리든 포기하지 않으면 우린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가 있을 거라고. 나이가 주는 불안감과 프레임을 버리면 훨씬 가볍게 시작할 수 있다고. 오늘이 시작하기 가장 완벽한 날이다. 가장 젊은 날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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