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
상처만 남은 겨드랑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칼로 벤 듯 날카로운 고통에 외마디 비명이 새어 나왔다. 처참하게 망가진 몸뚱이는 그날의 고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다. 한때 날개가 있었다는 것을.
추락했다. 그리고 날개를 잃었다. 몸이 중심을 잃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추락하기까지는 찰나였다. 상실의 고통은 상상을 넘어섰다. 육신과 정신의 고통이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히 파고들었다. 살아오면서 불행은 남의 얘기인 줄 알았다. 사건 사고가 매일 뉴스에 보도되고 구급차에 사람들이 이송되어 가는 걸 봐도 나와는 무관한 세상일이라 여겼다. 가끔 하는 알량한 봉사와 매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얼마 되지 않는 기부금이 인간으로서 책임과 도리에 면죄부를 줄 거라 믿었다. 남의 불행에 담담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날 툭 찾아온 불행은 나의 육신과 정신의 날개를 꺾어 끝도 없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웅크린 채 떨고 있던 나는 불행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었다.
밴쿠버의 오월은 눈부셨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았다. 여름을 준비하느라 한창인 초록, 따스해지는 햇살, 뽀송뽀송 말라가는 대지,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 모든 게 시계 초침처럼 일사불란하게 유월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걸까? 여기가 어디지?'
긴 잠을 잤다고 생각했다. 눈을 떠보니 나만 홀로 다른 세상에 남겨졌다.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하얀 벽면에 'Emergency Room' (응급실)이라 쓰여있었다. 푸른 가운에 하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내 주위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빛 하나 건네는 이 없는 낯설고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싹둑싹둑 거침없는 쇳소리와 함께 내 몸뚱이에 붙어있던 옷가지들이 조각조각 뜯겨 쓰레기통으로 무참히 처박혔다. 발가벗겨진 몸뚱이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도 허락하지 않았다.
춤추듯 빠르게 움직이는 손과 표정 없는 눈빛, 뭔가 말을 해야겠는데 입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딱 붙어버린 입과 달리 온몸은 추위와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몇 시쯤 되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예정대로라면 나는 학교에서 중간고사를 보고 있어야 했다. 몸을 추슬러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가 데리러 오길 기다릴 어린 두 아들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침대에 손발이 묶인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와 허리에 극심한 통증이 엄습해 왔다. 왼쪽 다리는 돌덩이이라도 매달아 놓은 듯 꼼짝 할 수 없었다.
'다리가 왜 이러지? 걸을 수는 있는건가?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칠 수는 있는 걸까? 아이들은 누가 돌봐주지? 앞으로 난 어떻게 되는거지?'
엉킨 실타래처럼 밀려드는 걱정과 두려움이 육신의 고통조차 삼켜버렸다. 누구 하나 말을 걸어주거나 내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는 이가 없었다. 컴컴한 동굴 속에 혼자 남겨진 나는 흐느낄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몇 달 같은 몇 시간이 흘렀다.
“괜찮아요?”
낯선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한 중년 여성이 나를 애처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애잔한 눈빛 때문이었을까? 몇 시간을 꾹 삼키고 있던 두려움과 걱정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오열에 나도 그녀도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서럽게 우는 내 어깨를 토닥여 주며 울음이 잦아들길 조용히 기다렸다.
“뭐 도와줄 일이 있나요?”
느릿느릿한 영어로 난 그녀에게 내 친구에게 연락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전화를 걸어 친구와 통화를 할 수 있게 도와줬다. 난 친구에게 학교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 줄 수 있는지, 도서관에 있을 남편에게 연락해 줄 수 있는지 부탁했다. 그녀는 내게 뭐 더 필요한 게 없냐고 재차 물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따뜻한 말을 건네고 자리를 떴다. 후에 알았다. 그녀가 소셜 워커라는 것을. 그날 그녀의 따뜻했던 눈빛과 친절에 난 큰 위로를 받았다.
의료진이 부족한 탓으로 예정된 다리 수술은 4번이 취소된 뒤 5번째서야 겨우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장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나고 눈을 떴다. 어린 두 아들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이들 옆으로 그사이 10년은 세월을 삼켜 버린 듯한 남편이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 년 안에 다리 재수술을 해야 할 거예요. 지금 준비하는 커리어는 앞으로 힘들 수 있어요. 앉아서 할 수 있는 다른 커리어를 찾는 게 좋을 듯해요.”
파란 눈의 영화배우처럼 생긴 수술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영화를 찍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적이지 않은 그의 비주얼과 믿기지 않는 상황이. 뭔가 대사를 뱉어야 하는데 생각나지 않았다. 뒤이어 의사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나사못 12개를 박아 부서진 뼈를 붙여 놨다고. 걸을 때마다 통증이 있을 거라고. 평생을 통증과 살아야 한다고. 진통제로 투여된 독한 모르핀 때문인지 몽롱했다.
'아니야! 뭔가 잘못된 걸 거야. 내가 왜? 하필 내가 왜?'
눈앞이 흐려지더니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빨리 병원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5월 어느 날, 난 예상치 않은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병원에서의 생활은 식사를 포함해 불편하고 힘든 게 많았다. 다른 언어로 인한 소통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놀라고 무서웠을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소셜 워커에게 울며 하소연했다. 우린 이민자라 아이들을 돌봐줄 가족이나 친척이 아무도 없다고. 비록 아픈 몸이지만 아이들 옆에서 마음이라도 다독여 주고 싶다고. 소셜 워커는 엄마인 내 마음을 이해한 듯 의료진을 설득해 나를 예정보다 며칠 일찍 퇴원할 수 있게 도와줬다. 그녀는 내게 필요한 휠체어와 보조 부츠, 그리고 목발을 챙겨줬다. 그리고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며 명함을 건네줬다. 퇴원하던 날, 그녀는 내게 잘 이겨낼 거라는 응원의 말과 따뜻한 포옹을 해줬다. 공포영화 같은 날들을 보내며 그녀 때문에 그나마 숨 쉴 수 있었다. 내 상황에 진심으로 공감해 주며 내 말에 귀 기울여준 그녀가 있어서.
수술 후 통증은 격렬했고 일상생활은 그 이상으로 처참했다. 다친 허리 근육으로 앉을 수 없어 누워 식사해야 했고, 볼일도 침대에서 해결해야 했다. 독한 약으로 머리가 한 움큼씩 빠져나왔고, 눈은 초점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몸을 꼼짝할 수 없으니, 초등학생 큰아이와 남편에게 모든 걸 의지해야 했다.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몸뚱이가 되어버렸다.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다칠 여유가 어딨어? 나는 어쩌라고.”
낯선 땅에 뿌리도 내리기 전 닥쳐버린 불행에 배우자는 당황스럽고 힘들어했다. 그의 말대로 우린 다칠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나와 아이들을 매몰차게 대했다. 그 또한 날개를 잃은 것 같은 상실감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난 그에게 유일하게 힘이 돼주는 존재였다. 서로에게 해줄 게 없던 우린 서로를 탓하며 할퀴었다. 힘든 상황을 투정할 곳도 위로받을 곳도 없었다. 남편에게조차 외면받은 나는 한겨울 길을 잃고 찬비를 맞고 서 있는 길 잃은 7살 아이였다. 춥고, 무섭고, 외로웠다. 한편으로는, 하루아침에 도움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민폐가 된 몸뚱이에 억울하고 화가 났다.
초등학교 5학년인 속 깊은 큰아이는 아빠 엄마가 힘들어하는 걸 아는지 제 할 몫 이상을 하려고 애썼다. 어리고 눈치 없는 작은아이는 자주 말썽을 피워 형을 고생시켰고 아빠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큰아이는 아빠와 동생 아침을 준비하고 내가 먹을 약과 간식을 챙겨두고 학교에 갔다. 낯선 상황에 힘들어하며 눈치 보는 아이들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행여 속상한 마음에 언성이라도 높이면 아이들이 더 힘들어졌다. 내게 찾아온 사고로 가족 누구 하나 자유롭지 못한 채 불행이라는 주홍 글씨를 가슴에 새겨야 했다. 누워있는 침대에 푹 꺼져 그대로 흔적 없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슬픔과 비참함을 푹 뒤집어쓴 채 간신히 숨만 쉬었다.
원망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내 탓만 하기엔 억울했다. 배우자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굳이 이 낯선 땅에 나를 끌고 와 이런 사고를 당하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오고 싶지 않은 이민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왔는데 이런 일까지 겹치니 모든 게 남편 탓 같았다. 하지만 본인 돌보기도 힘든 그는 이런 내 마음을 전혀 헤아려 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사고를 당한 나를 탓하며 원망했다. 남편 탓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아 신을 소환했다. 나를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신을 저주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런 벌을 받게 내버려 둔 걸까? 살면서 크게 죄 안 짓고 하루하루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뭘 그리 밉보여 이런 고통을 내린 걸까? 하필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내게 그나마 나를 지탱해 주던 다리를 철저히 망가뜨렸을까?'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신이 원망스러웠다.
천성이 다람쥐처럼 종종거리고 살뜰했다. 시골 동네 앞 들판과 뒷산을 제집 드나들 듯 노니며 자랐다. 그 덕에 단단하고 야무진 발바닥을 가졌다. 종종거리는 거라면 지치지 않고 누구보다 잘했다. 차로 갈 거리도 부러 걸어 다닐 정도로 걷는 걸 좋아했다. 걸으면 생각이 꿈틀대고 의식의 경계가 풀리는지라 슬플 때도, 기쁠 때도, 괴로울 때도 사방을 총총거리며 다녔다. ‘산책’이란 단어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다. 그랬던 내가 더 이상 산책을 할 수 없고 종종거리며 바지런을 떨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없이 태어난지라, 내세울 거라고는 튼튼한 다리로 할 수 있는 바지런함이 다였다. 몸으로 하는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덤볐다. 그런 탓에 어디를 가나 환영받고 사랑받았다. 도움받는 것보다 도움 주는 게 익숙한 삶을 살았다. 일거리가 있으면 남들이 하기 전 나서서 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음식을 해 먹이는 수고를 기쁨이라 여겼다. 종종거릴 수 있는 다리가 있으니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 다리가 더 이상 서는 것도 걷는 것도 힘들어 제구실할 수 없게 된 날, 난 존재가치를 잃어버렸다.
이민 와 캐나다라는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다. 이곳의 삶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불편하고 어색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묘한 편견과 차별로 자신감마저 바닥이었다. 그나마 유치원 교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어 하루하루를 버텼다. 한국에서 학교에 몸담고 있었던지라, 이곳에 와서 교사가 되려고 대학에 들어갔다. 학생인 남편과 아이 둘을 뒷바라지해 가며 바쁘고 힘들게 살았지만 미래의 소박한 꿈이 있어 견딜만했다. 하지만 사고로 내 미래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더는 교육자로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커리어를 바꿔야만 한다는 수술 의사의 말은 내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하루아침에 튼튼했던 다리와 미래를 모두 잃어버렸다.
뼈가 으스러져 오는 육신의 고통은 참을 만했다. 두 아이도 자연분만 한 내가 아닌가. 하지만 미래를 잃은 정신적인 추락과 허탈함은 나를 끝도 없는 심연으로 밀어냈다. 나락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는 것이었다. 창으로 내다보는 세상은 창문만큼의 크기만 허락했다. 그렇게 움직일 수 없는 몸뚱이를 하고 답답한 세상에 갇혀 있던 어느 날이었다.
“투두둑, 투두둑.”
창문에 연달아 꽂히는 비명 같은 푸드덕 소리에 눈을 떴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창에 부딪혀 발코니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작은아이가 타 놓은 설탕물을 먹으러 자주 찾아오는 벌새였다. 고통스럽게 날개를 퍼덕이는 새 옆으로 바닥에 떨어진 깃털이 눈에 들어왔다. 새도 날개가 꺾인 걸까? 무심코 손을 뻗어 내 겨드랑이 안쪽을 움켜줘 봤다. 날개를 잃은 처절했던 고통의 흔적만 만져질 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난 세상에서 제일 재수없는 여자가 되어있었다. 다시는 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