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을 가야겠어!"
"아니, 이민이 어디 동네 이사야?"
어느 날, 캐나다로 마음이 달아난 배우자가 이민을 가겠다며 선전포고를 했다. 따로 상의도 없었다. 무심하게 동네이사 말하듯 내뱉는 그의 얼굴에서 결의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남들처럼 자녀교육이라는 거창한 명분도 없었다. 타고나길 줄 서는 것에 관심과 재능이 없던 그였다. 묵묵히 일만 하던 30대 중반의 연구원였던 그는 방황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미래의 커리어가 그려지지 않아.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본인 아버지와의 사이도 메울 수 없는 마음의 골이 생기고 있었다.
"나한테 잘하는 자식한테 다 물려줄 거야!"
시아버지는 자식들을 경쟁시켰다. 재산으로 자식들을 쥐락펴락하고 싶어 했다. 몇 년째 사탕을 들고 줄듯 말 듯 감질나게 하는 시아버지로 배우자는 힘들어했다. 나 또한 아이만 낳으면 돈걱정 않고 살게 해 주겠다는 시아버지의 말을 믿고 커리어를 포기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 사과 떨어지길 입 벌리고 쳐다보고 있는 처지가 한심했다. 우리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시아버지는 돈으로 희망을 주고 싶었겠지만 우린 절망을 씹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공수표만 남발하며 단 하나뿐인 아들을 잃어갔다.
"왜 이민을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가서 뭐해먹고살려고? 영어는?"
몇 달을 치열하게 싸웠다. 마음이 돌아선 그는 뜻을 꺽지 않았다. 본디 행동이 굼뜬 그가 이민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촌년이라 태어나 외국을 가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외국에 대한 환상도 없었다. 내게 외국은 훗날 여유가 생기면 가족여행으로 갈 수 있는 막연한 곳이었다. 영어도 할 줄 몰랐다. 영어는 대학원 때 졸업시험 치느라 공부한 문법이 다였다.
"가서 적응하면 되지. 사람 사는 곳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마트에서 밤새워 일을 하던지, 아니면 피를 팔아서라도 먹여 살릴게!"
그는 나를 다독였다. 그를 의심하며 짐을 쌌다. 밤새워 일할만큼 체력이 좋지도, 술담배에 절어 피를 팔 수도 없는 사람인 걸 알기에. 우린 그렇게 먹고 살 준비도 없이 대책 없는 이민을 오게 되었다.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룬 밴쿠버에 온신걸 환영합니다."
환영인사를 흘려들으며 밴쿠버 공항에 내렸다. 추적추적 비 내리던 4월의 밴쿠버는 내 기분처럼 멜랑꼴리 했다. 공항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들뜬표정이 낯설어 나만 이방인이 된 듯했다. 여행을 온 건지 유학을 온 건지 모를 그들의 얼굴엔 웃음과 설렘이 묻어났다. 나에게 이민은 앞도 보이지 않는, 목표도 없이 떠나는 항해 같았다. 그럴싸한 배도 없이, 우리 가족은 작고 초라한 돛단배의 닻을 올렸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를 항해를 시작했다.
수많은 폭풍우를 만났고, 길을 잃었고, 난파선이 되기도 했다. 우린 꾸역꾸역 다시 일어섰고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돌아갈 곳이 없으니. 조그만 아파트를 팔고 국민연금까지 다 끌어온지라, 돌아갈 곳도 기댈 곳도 없었다. 앞만 보고 나아가야 했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더딘 항해에 우린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 앞으로 나아가는 날보다 물살에 휩쓸려 표류하는 날이 더 많았다.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데 통장 잔고는 빛의 속도로 줄고 있었다. 비싼 밴쿠버의 월세와 생활비는 우리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아끼고 아껴도 한숨과 걱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러려고 캐나다 왔어?"
녹록지 않은 정착에 서로의 탓을 하기 시작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가는 밴쿠버의 삶에 우린 지쳐갔고, 원망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배우자는 직업을 구하려 여기저기 지원했지만 면접조차 쉽지 않았다. 그는 지쳐갔고 언제부턴가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처음의 자신감은 온 데 간 데 없이 그의 어깨는 끝을 모르고 쳐져갔다. 경력과 전공을 살려 직업을 찾지 못한 그는 접시닦이를 비롯해 이런저런 일들을 찾아 했지만, 그의 벌이로 생활비는 고사하고 월세도 낼 수 없었다. 난 아이들이 데이케어와 학교에 있는 시간에 봉사하며 정부에서 하는 영어 프로그램을 들었다. 그러다 살림에 보탬이라도 되려고 스시집에 지원해 면접을 봤지만 무참히 떨어졌다. 내 영어와 외모는 식당에서조차 자격미달이었다. 자격지심이 들었다. 영어는 둘째치고 지원을 해도 면접 보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다. 누구 하나 우리의 경력과 학력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식료품점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저런 좋은 일을 가질 수 있지? 나에겐 식료품점에서 일하는 것도 먼 꿈같아 보였다.
그동안 간직했던 나의 꿈과 정체성이 변하고 있었다. 캐나다에서의 나는 영어를 못하는 한낱 미개한 동양인이었다.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려 해도 주위의 시선과 태도가 나를 흔들었다. 나의 정체성은 나도 모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어찌어찌 대학과 대학원을 나오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에 나가 하대를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놀던 물이 고만고만한 물이라 크게 치이는 거 없이 그 물에서 안전했다. 크게 잘나지 않았지만 크게 못난 것 없이 열등감이란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살면서 주류사회나 잘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끼는 것에 관심이 없어 사회계층이란 것에 무심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난 바닥 계층이 되어 있었다. 물론 대놓고 내게 그렇게 말하는 이는 없었다. 최하층이라고. 하지만 공부를 하며 직장생활을 하며, 난 내가 이곳 사람들에게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는지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최근 오스카에서 논란이 된 '아시안 패싱'은 어디든 존재했다. 차별은 다양한 모습과 결로 오는지라 분간조차 쉽지 않았다. 차별이 아닌 내 잘못, 내부족으로 자책하기 쉬웠다. 차별은 그렇게 교묘하게 프레임을 씌웠다. 슬프게도 한국에서 something이었던 내가 이곳에서는 nothing이 되었다.
"네가 영어가 안되어 이해를 못 한 거잖아? 네가 잘못안거야?"
캐나다의 삶은 어딜 가나 눈치가 보였다. 남의 집에 세 들어사는 기분이었다. 이민자가 영어가 부족한 건 당연한데, 현지인들 앞에 주눅이 들어 나의 권리를 쉽게 포기해야 했다. 그들은 나의 권리를 함부로 유린해 갔다. 음식이 잘못 나와도 따지지 못했고, 가끔 따진 들 그들은 내가 잘못 주문했다고 덮어 씌었다. 현지인 취업 카운슬러는 본인 휴가로 내 트레이닝 지원서를 까먹고 제출하지 않았다. 후에 그녀는 본인 잘못을 덮으려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들어 오래 걸렸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정부기관에 했다. 그녀가 칼자루를 쥔지라, 난 불이익을 당할까 따질 수조차 없었다. 도움이나 상담이 필요해 학교나 기관에 전화를 걸면 상대방이 대화도중 말없이 끊어버리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들은 내가 나의 부족한 영어 때문에 나 자신을 낮추고 미안해할수록, 나를 함부로 만만하게 대했다.
전문대에 들어가 일반과목을 수강할 때였다. 처음으로 그룹 프로젝트라는 걸 했다. 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3명의 현지인과 팀을 하게 되었다. 그 애들은 처음부터 대놓고 나를 무시했다. 과제 토론이나 정보를 나눌 때도 본인들끼리만 말하고 결정을 내렸다. 투명인간 취급하는 그 애들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론 모욕감도 느꼈다. 내 영어에 애들이 답답할 수 있고, 그 애들과 나이차도 많고 그러니 불편하겠지. 난 모든 탓을 나에게 돌렸다. 내가 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애들은 집요하게 나를 따돌렸고 막판에 교수에게 내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오랫동안 모든 인간은 선하다는 성선설을 믿었다. 내가 잘하면 상대도 변할 거라 생각해 진심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그 뒤로 난 성선설을 믿지 않게 되었다. 세상엔 사악하고 교활한 인간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은 절대 공평하지 않다는 걸 믿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문제라는 것도 알았다.
"이민자는 허드렛일부터 하는 거야! 그것도 감사해야지."
이민자는 청소부나 접시닦이를 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현지인들! 학교에서조차 case study를 할 때면 과 애들은 이민자에게 청소부라는 직업을 부여하고 경제, 언어능력이 안 되는 그룹으로 만들어 case를 진행했다. 한국에서 좌절은 비할게 아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 인종차별까지 더해진 신세계에서 나의 권리를 논하는 건 사치였다. 하루하루 눈앞에 놓인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영어를 못하는 유색인종이라는 주위의 편견과 잣대 그리고 사회적인 냉대가 늘 따라다녔다.
"캐나다에 기여할 좋은 이민자만 받아야 해!"
이곳 몇몇 현지인들은 대놓고 말했다. 그들 또한 유럽에서 온 이민자인 주제에, 새로운 이민자는 이곳에 기여할 사람들만 받아야 한다고 입모아 말했다. 선민사상이 가득했다. 백인인 본인들은 타고나길 우월하고 이민자는 본인들 뒤치다 거리를 해야 하는 그룹이라는. 이민자로서 권리와 평등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없던 난 뾰족뾰족해져 갔다. 눈에 띄지 않은, 모나지 않은 삶을, 겸손한 삶을 기도하던 내가 점점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를 높일 기회를 찾게 되었다. 물론 선의와 연민으로 나를 도와주던 현지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살면서 깊게 자리한 internalized oppression (내면화된 억압)으로 내 안엔 자격지심과 분노가 쌓여갔다.
“제발 겸손하게 해 주세요!”
한때 겸손을 위해 10년을 기도했다. 부디 겸손을 달라고. 6남매에 막내라 친정식구들에게 사랑과 격려를 많이 받고 자랐다. 친정에서 굴러온 돈복은 없지만 사랑복은 넘쳤다.
“우리 막내는 잘하지! 넌 잘할 줄 알았어!”
칭찬과 격려를 배불리 먹고 자란지라 자신감과 자존감이 63 빌딩보다 높았다. 그래서일까? 부작용으로 겸손이 부족했다. 그리고 살면서 겸손이란 말이 불편했다. 주변에 진짜겸손보다는 겸손의 가면과 가식을 쓴 사람들을 많이 본 지라.
“당신은 겸손만 하면 정말 사람들이 좋아할 거 같아! 불필요한 오해도 안 받고!”
배우자가 말했다. 의사표현이 확실하고 밝고 씩씩한 성격에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분에 겨운 사랑과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괜한 오해나 불필요한 일에 연루되기도 했다. 말이 직설적이고 겸손하지 못해 쓸데없는 미움이나 공공의 적이 되기도 했다. 말이 당당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남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세다는 오해를 샀다. 그래서 한국인의 최고 미덕 중 하나라는 겸손을 긴 세월 간청했다. 겸손이 '촥'하고 장착되면 좀 쓸데없는 인간관계 잡음이 사라지려나? 사람들한테 고루고루 사랑받을 수 있으려나? 그런 기대도 있었다. 그러다 겨우 그분 (겸손)이 올 찰나, 캐나다에 오게 되었다.
근데 상황이 확 바뀌었다. 겸손이 사치가 되었다. 난 겸손은 고사하고 늘 기죽어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난 어딜 가나 부족하고,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 여기저기 치였다. 학교에서 카운슬링 수업을 받을 때, 잡인터뷰를 보러 다닐 때, 프렉티컴에서 서포트 그룹을 진행할 때, 항상 주눅이 들어 눈치를 봤다. 어딜 가나 영어는 꼴찌인데, 나이는 일등였고, 유일한 동양인일 때가 많았다. 교수님들은 내게 좀 더 큰 목소리로 자신감 있게 말하라 하고, 슈퍼바이저들은 나에게 나 자신을 믿고 당당해지라 했다. 취업을 도와주던 카운슬러들은 한결같이 “fake it till you make it”말하며 자신 있는 '척' 하라고 응원해 줬다. 하지만 좀처럼 '자신감 있는 척' 하기가 어렵고 힘들었다.
“Fake it till you make it!”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이 들어 본 말 중 하나다. 아니, 사기 치라는 거야? 아님 뻥치라는 거야? 거대한 혼란이 왔다. 장착된 자신감이 없으니 이런 말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감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원하는 걸 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는 뜻인 이 말이 와닿지 않았다. 이곳서 학교와 직장 생활을 하며 이곳 사람들은 자신감 있게 말하고 행동할 때 더 들으려 하고 좋아해 준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동은 별개였다. 그리고 한국과는 다른 반응에 헷갈렸다. 한국에서는 자신감 있어하면 불편해하거나 재수 없어하지 않나? 너무 당당하면 잘난 척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좀 안다고 얘기하면 나댄다고 하지 않나?
이곳에 온 뒤로 겸손을 기도하지 않는다. 누구도 내게 겸손을 묻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겸손은 개나 줘버려”가 되어버렸다. 겸손도 겸손할 만한 여유가 있을 때 얘기다. 나를 낮출수록 자신감과 자존감이 사라졌다. 아득바득 이민자로 사는 내게 겸손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겸손한답시고 나를 낮춰 얘기하면 상대는 어김없이 나를 무시하려 들었다. 영어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고 타이틀도 없다 보니 더 그랬다. 나를 설명해 줄 뭔가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굳이 나 자신을 낮출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나친 겸손은 자기 파괴를 가져올 수 있고, 상대로 하여금 나를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을. 특히 가만히 있으면 ‘만만해’ 보이는 작은 동양인으로 그나마 나를 드러내야 기회가 생긴다는 걸. 나에게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자기 비하라는 것을.
"내가 과소평가되는 부분이 있는데, 난 너희들 기대이상의 능력과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야!"
난 끊임없이 나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줘야 했고, 나의 정체성을 찾아야만 했다. 척을 더 해야 했다. 그래서 살짝 오려던 겸손을 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난 쉽게 잊혀갔다. 난 어디서건 나 스스로를 self-proclaim (자기선언) 하듯 나를 정의해야했다. 그들은 나의 전화를 듣지도 않고 무례하게 끊어버렸고, 나를 측은하게 혹은 한심하게 바라봤다. 내가 나의 권리를 찾지 않으면 툭하면 language barrier (언어장애)란 말로 자신들의 오만함과 실수를 덮으려 했다. 이민자 친구들과 동료들이 부당한 대우에 따지지 못하고 본인들 탓으로 돌리는 걸 봐왔다. 영어가 안돼서 그런 거야! 내가 저들과 문화가 달라 저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그들은 모든 걸 본인 탓으로 돌렸다.
"좀 전에 전화했던 사람인데, 왜 전화를 말도 없이 끊었죠? 이름이 뭐예요?"
난 점점 까칠해져 갔다. 안 되는 영어로 친절하게 말하면 그 친절은 절대 되돌아오지 않았다. 증거를 들이밀며 부족한 영어라도 따박따박 따지면 그때야 그들은 잘못을 인정했다. 대화도중 전화를 끊어버린 대학 직원에게 다시 전화해 이름을 요구하며 따졌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나하나 그냥 넘어가면 그들은 또 다른 이민자에게 그런 똑같은 짓을 할 것을 알기에. 가끔은 지치는, 별 내키지 않는 맞짱을 떴다. 조금이라도 그들이, 세상이 바뀌는데 일조하는 거라는 믿음을 갖고.
"겸손은 개나 줘버려!"
점점 나의 권리를 내세우며 투사가 되어갔다. 겸손도 알아봐 주는 이들 앞에서 겸손이 빛을 발하는 거라 믿게 되었다. 나의 노력과 과정을 인정해 주는 이들 앞에서나 통하는 게 겸손이다. 나의 친절 또한 그 친절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이에게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누가 캐나다가 좋다고 했던가? 그건 돈 있고 영어 되고 이곳서 할 거 있는 사람들 얘기였다. 우리처럼 돈도 달랑달랑하고 영어도 부족하고 직업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인 이민자에게 캐나다는 살벌했고 불친절했다.
삶이 녹록지 않던 캐나다지만 짬짬이 데이케어에서 봉사하며 차근차근 English 12를 준비했다. 그리고 공립전문대의 유아교육과에 원서를 냈고, 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하게 되었다. 더디지만 조금씩 일상이 자리 잡아가는 듯했다. 춥고 지루했던 겨울이 지나며 따뜻한 봄이 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평화로울 것만 같던 5월 어느 날, 응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인생은 한 번도 내게 쉬운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