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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지 Mar 18. 2024

다 그렇게 살아, 유난 떨지 마

"여자는 다 그렇게 사는 거야! 나도 그랬어."

이런 식상한 얘기를 수없이 들으며 가스라이팅 당했다. 여자는 맞벌이를 해도 당연히 끼니마다 남편 밥을 차리고, 집안일을 맡아하고, 시댁 행사에 꼬박꼬박 품을 팔아야 한다고. 세뇌가 된 데다 태생이 촌년인지라 이런 말이 귀에 찰싹 달라붙었다.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아내와 며느리란 타이틀로 형성된 불가항력의 자기장은 의무와 책임을 자석처럼 촥촥 갖다 붙였지만, 누구나 겪는 일이라 여겼다. 억지로 등 떠밀려 한 결혼이 아닌 내가 선택한 결혼이기에 고구마줄기처럼 딸려오는 의무와 책임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결혼을 유지하는 원칙이라 여겼다. 하지만 나의 인내심이 임계점에 다 달았을 때 깨달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이 있나? 완전 개소리야! 실소가 나왔다. 


"너랑 잘 지내고 싶어. 너를 내 딸처럼 생각할게. 우리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자!"

신혼 초, 고운 얼굴에 여자여자한 시어머니가 수줍게 사랑고백하듯 내게 말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날름 믿었다. 며느리가 딸이 될 수 있다는 헛된 꿈을 품었다. 시어머니에게 딸이 이미 셋이나 있는데 말이다. 오리가 백조가 될 수 있다는 망상을 가졌다. 딸이 될 수 있다고 믿은 난 좋은 게, 귀한 게, 예쁜 게 있으면 시어머니를 먼저 챙겼다.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내가 진심을 다해 노력하면 딸처럼 허물없이 가깝게 지낼 수 있는지 알았다. 왜 그땐 몰랐을까? 시어머니는 절대 내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걸. 본연의 거리 두기를 해야 건강한 관계를 그나마 유지할 수 있는 것을. 


시댁에서 얻어 준 신혼집은 배우자직장 바로 옆이었다. 논밭을 가로질러 언덕에 자리한 그가 다니던 연구소 옆의 작은 마을이었다. XX 리로 시작하는 수원 근처의 화성. 남편은 차로 5분 거리였고, 난 대학원은 편도 2시간 30분에서 3시간이 걸리고, 직장까지는 최소 1시간 30분 이상 걸렸다. 남편이 다주택에 작은 전셋집을 얻고 내가 살림을 해갔다. 그래서 시골 다세대 주택도 감사했다. 버스정류장 푯말도 없는 논밭길에 서서 30분에 한 대 오는 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다니고, 산본과 수원에 있는 직장을 다녀야 했지만 불만을 갖지 않았다. 곱게 자라지 않은지라 웬만한 불편은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가고, 이틀은 산본에 있는 문화센터에 출강을 나가고, 이틀은 초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갑자기 시작된 IMF로 배우자가 기본급만 가져온지라 열심히 같이 벌었다. 어쩌다 버스가 사람이 많아 지나쳐 버리면 30분을 허허벌판에서 다음버스 오기만 꼬박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장거리를 오가며 난 방광염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 만성이 된 방광염이 툭하면 도진다. 생각해 보면 왜 며느리 학교나 직장은 전혀 배려하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게 배우자위주로 섭리처럼 돌아갔다. 스스로 나를 배려하고 보호하는 걸 배우지 못한지라 주어진 섭리에 순응했다. 남는 게 체력과 젊음이라 군소리 없이 견디었다. 일 년 뒤 바짝 같이 벌어 모은 돈을 합해 수원으로 이사를 나왔다. 사실 거리의 불편함보다는 원룸주택에서 차가 자주 망가지는 사고를 당했다. 타이어를 펑크 내놓고 유리를 파손시키고. 주차공간이 부족해 각박한 곳이었다. 배우자는 이제 직장까지 차로 20분, 난 1시간 정도면 직장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산본에 있는 문화센터 강의를 일 년쯤 나갔다. 강의가 인기가 많아 수입이 괜찮았다. 욕심이 생겨 오산시에 새로운 문화센터사업권을 본사에 지원해 따냈다. 꿈에 부풀어있었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우자와 함께 열심히 문화센터자리를 알아보고 다녔다. 그도 덩달아 들떠 있었다. 내가 모아놓은 돈과 친정언니들이 조금씩 투자해 주는 돈으로 얼추 건물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신혼은 알콩달콩한 재미보다 어떻게 하면 빨리 돈 모아 집을 사고 자립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배우자가 내 꿈을 지원해 줄 능력이 안되는 걸 알았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내 힘으로 자리를 잡고 싶었다.  


"아이를 먼저 낳는 게 어떻겠니? 돈 때문에 계속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거면, 내가 너희들 지원해 줄 재력은 되니, 아이부터 낳으면 좋겠다."

문화센터를 준비하던 어느 날, 시부모님이 나만 따로 불렀다. 두 분은 내게 명령 같은 부탁을 간곡하게 했다. 서른 된 며느리 나이도 신경 쓰이고, 대가 귀한 종갓집인지라 손자를 빨리 보고 싶어 했다. 시아버지도 배우자도 외아들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창박으로 보이는 늦가을 풍경이 내 맘처럼 스산했다. 종갓집 외며느리로 책무를 느꼈지만 어렵게 따낸 사업권이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부모님과 갈등이 시작되고, 거듭되는  간곡한 청으로 꿈을 접게 되었다. 종갓집 외며느리의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러 밤을 고민하다 문화센터 사업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줬다. 가끔 생각해 봤다. 내가 문화센터를 했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내가 경제적 성공을 이뤘다면 배우자가 굳이 이민을 오자고 했을까? 물론 망했을지도 모른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삶이니. 


첫아이를 임신하고 유산기가 심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퇴근길 아랫배에 극심한 통증과 함께 피를 많이 흘린 날, 산부인과 의사가 몇 주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와중에 배우자는 뜻하지 않은 차사고를 내 우린 큰 빛을 떠안게 되었다. 시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내가 문화센터를 연다고 할 때 앞으로 재정적 어려움 없이 살게 해 주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우린 적금을 해약하고, 차를 팔고, 융자를 받아 사고처리를 했다. 임신 전 열심히 일해 모아뒀던 돈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타고난 식탐에 임신까지 겹쳐 눈만 뜨면 먹고 싶은 게 많던 시기였다. 하지만 임신기간 내내 붕어빵과 소보로 빵으로 식탐을 달래야 했다. 


다행히 건강한 첫 아이를 오랜 진통 끝에 낳았다. 무조건 아들을 바라는 배우자와 시댁의 바람에 친정엄마는 얼마나 맘을 조렸는지 모른다. 엄마는 절에 가 치성을 드리고 내게 아들 낳는다는 부적을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긴 일이다. 그게 어디 내 뜻대로 되는 건가? 그리고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떤가? 시아버지는 내가 임신하기 전부터 어디서 구했는지 복숭아 두 개가 그려진 큰 액자를 가져다 우리 집 안방에 걸어뒀다. 손자를 염원하며. 난 열 달 내내 기도했다.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손자를 애타게 원하는 시아버지와 두 아들이 소원이라는 배우자에게 아들을 꼭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야 나의 안위가 보장될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시댁과 배우자의 바램이 곧 나의 바램이 되어갔다. 그들의 가치관과 소망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갔다. 


배우자는 야근에 늘 늦게 귀가했고 주말이면 낚시를 다녔다. 그러려니 했다. 그 또한 직장생활이 녹록지 않을 테니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하다 여겼다. 아이가 딱 돌이 되었을 때, 근처 유치원에 미술선생으로 취직을 했다. 그러면서 매주 월요일과 토요일엔 대학에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다. <산업디자인론>과 <디자인연구학>을 가르쳤다. 근데 아이가 아프면 직장을 나가거나 강의를 다니기 힘들었다. 근처에 시댁 말고 의지할 때가 없었는데, 시어머니한테는 맡길 엄두를 못 냈다. 간호사인 시누이 아이는 봐줘도 우리 아이는 입 벙긋도 할 수 없었다. 친 손자본걸 티나게 기뻐하는 시아버지로 인해 시어머니는 우울증을 겪을 만큼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시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사랑표현을 못 받아본 시어머니는 섭섭한 게 쌓여 있었다. 25년 시집살이와 엄한 남편 그늘에서 시어머니는 숨도 크게 못 쉬고 세월을 견뎠다. 상황이 그런지라 시아버지의 표나는 며느리 사랑은 시어머니를 분노하게 했고 나는 시댁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갔다.  

"내가 아들 낳았을 때는 기쁜 내색 없더니, 며느리 아들 나니 그렇게 기쁘냐!" 

시어머니는 나뿐만 아니라  친손주인 내 아이도 냉대했다. 


시어머니는 배우자에게 육아를 거들지 못하게 했다.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도 아녔지만, 시어머니는 한술 더 떴다. 한 번은 시어머니가 늙은 호박 30개 정도를 따다 놓고 모두 깎아 씨를 발라 놓으라 했다. 난 9개월 남짓한 큰아이가 말질할까 신경 쓰여 옆에 게임하던 남편에게 아이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시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아이 업고 집안일 다했다. 우리 아들 시키지 마라!"

배우자는 남편으로서 역할을 배우지 못하고 결혼을 했다. 부모님께 배운 게 없으니 본인이 뭘 해야 하는지, 뭘 잘못하고 있는지 몰랐다. 구구절절 시집살이한 걸 한탄하고 싶지 않다. 내 세대에서는 흔한 일이었고, 나보다 심한 경우도 많이 본 지라. 그땐 시댁 현관 앞에 서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같은 기분이었다. 나를 이해해 주거나 따뜻하게 반겨주는 이가 없었다. 내편이 없었다. 시아버지는 아들 낳은 며느리를 예뻐는 했지만, 돈으로 자식을 주무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킬 마음도 없는 말로 나와 배우자를 들었다 놨다 했다. 자식과의 관계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던 시아버지는 끊임없이 돈으로 자식의 마음을 취하려 했다. 순수한 배우자는 힘들어했고,  본인 아버지와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급기야 그는 시댁을 잘 가지 않게 되었다. 그의 몫은 내가 감당해야 했다. 나와 아이만 시댁 행사에 참여하는 날이 늘어갔다. 최소한의 방패도 없이 모든 화살을 혼자 맞아야 했다. 


커리어를 놓기 싫었던 나는, 친정 옆으로 이사를 했다. 가끔 아이가 아프면 믿고 맡길 곳이 필요했다. 미술학원을 열고 대학 강의도 계속 나갔다. 그렇게 나의 꿈을 찾아 한 발씩 나아갔다.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듯했다. 그러다 둘째 아이가 생긴 난, 수입의 반 이상을 아이들 돌보는데 써야 했다. 설상가상 독박 육아와 살림을 했다. 가끔 외식을 가도 난 작은아이 젖을 물리고, 큰아이 밥을 떠먹이고, 비빔밥도 못 비비는 배우자를 위해 밥을 비벼주고, 생선도 못 바르는 그를 위해 생선을 발라 그 앞에 놔줬다. 내 몸이 자동시스템처럼 빠릿빠릿 작동했다. 자란 환경과 성격이 느긋한 그와 천성이 게으르지 못한 나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혼자 종종거리던 난, 늘 부족한 수면으로 만성 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렸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두개골이 심하게 흔들렸고, 아침에 눈을 뜨면 천장이 뱅글뱅글 돌았다. 갖은 게 체력였던 내가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약을 달고 살았다. 


배우자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는 스타그래프트에 빠져 새벽에 잠들곤 했다. 우린 한집에 살며 부부라는 이름하에 전혀 다른 결혼의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혼이란 단어를 주머니가 닳도록 꺼냈다 넣었다 반복했다. 명절 친정서 돌아오는 길엔 예고된 신파극을 어김없이 찍었다. 상대방 가족의  서운함과 치부를 꺼내 들며 격렬하게 싸웠다.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클라이맥스에서 내가 서럽게 울어야 겨우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명절극을 지치지도 않고 재생반복했다. 우린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였다. 힘만 잔뜩 들어갈 뿐 돌아가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싸운 날은 어김없이 자책했다.  내가 그를 닦달했나? 내가 참았어야 했나? 그도 회사생활로 스트레스가 많을 텐데. 잠이나 잘 잤으려나? 밥이나 먹고 출근했을까? 모든 게 내 탓같았다. 별일 없었다는 듯 덮고 싶었다.  그가 말이라도 걸라치면  난 이미 코끝이 찡해지며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가 좋아하는 찬을 곁들여 따뜻한 저녁상을 차렸다. 미련했다. 잠깐의 평화를 위해 나를 너무 쉽게 저버렸다. 


수없이 나에게 물었다. 내가 한 결혼이 이거였던가? 힘들게 공부한 게 이렇게 살려고 했던 건가? 그러다가도 아이가 아플 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나’란 자책감으로 괴로워했다. 거듭되는 갈등과 체력적 한계로 난 지쳐갔고 급기야 커리어를 접었다. 한편으로 매년 똑같은 지식으로 학생들 앞에 서는 게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과연 좋은 강사인가? 대학생들을 가르친다며 안일한 지식으로 내 욕심만 채우는 건 아닌가? 하지만 아이들이 있으니 지식을 쌓고 교류하기 위한 콘퍼런스나 배움은 생각할 수 없었다. 디자인이란 필드가 빠르게 변하는 분야인데 난 그 변화에 점점 뒤처져 가고 있었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 콤플렉스도 마음 한편에 꽈리를 틀고 있었다. 커리어를 그만둘 충분한 변명거리가 넘쳤다. 커리어를 접은 후 일 년은 산후우울증과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힘들었다. 경력 단절은 곧 실패자란 주위 시선이 신경 쓰였고 육아에 대한 사회적인 몰이해가 힘들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별 가치가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시선이 팽배했고, 나 또한 자아실현이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엄마로 산다는 게 사실 얼마나 위대한가? 그땐 몰랐다. 내 안엔 자격지심과 자기연민만 창고에 먼지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유난 떨지 마! 너만 그런 게 아니야. 결혼하면 다 그러고 사는 거야."

나의 주권을 시댁과 배우자에게 내준 채 살았다. 누구나 그렇게 사니 그게 세상 이치라 여겼다. 내 삶은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처럼 배우자와 시댁만 오매불망 바라보며 쳇바퀴 같은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었다. 난 길들여져 갔고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며 순응해 갔다. 나를 다독였다. '그래, 나만 이러고 사는 게 아닌걸. 아이들 건강하게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잘하면 되지.' 내가 내 권리를 요구하지 않으니, 가족이 사회가 내게 의무와 책임만 점점 더 강요했다. 그렇게 '꿈'이란 단어보다 '체념'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져가던 어느 날, 내 이름 석자보다 '누구 엄마'라는 이름에 더 빨리 반응해가던 어느 날이었다. 저 멀리 배우자가 달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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