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독립만세!"
삼일절에 '대한독립만세' 대신 '내 인생 독립만세'를 외쳤다.
내 삶에 온전한 주권을 찾기 위해.
살면서 내 삶의 온전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부단한 계몽과 항거로 이제야 내 삶의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자주적인 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주권의 주체인 나를 보호하고 나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나 우선의 삶을 지향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세월을 가정, 학교, 직장,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과 성 역할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세상이 정해준 의무와 책임과 타협하며 무덤덤한 어른이 되어갔다. 세상은 나의 뜻을 묻지 않은 채 암묵적인 동의를 강요했다. 튀지 않으려 했고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려 애썼다. 여자, 엄마, 아내, 며느리, 그리고 이민자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렇게 사는 게 정상이고 옳은 길이라 교육받았다. 권리를 감히 논할 처지가 못됐다. 타고나길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 태어난지라 의무와 책임을 요구받는 게 당연하고 편했다. 존중받고 권리를 보호받는 건 내가 속한 세상밖의 일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보여주는 여자의 삶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공감은 하지만 동정의 대상이 되는 주인공의 삶이 싫었다. 잠깐의 위로는 받았지만, 뒤에 오는 씁쓸함이 비참하고 서글펐다. 할 수만 있다면 인생 무대에 신파극이 아닌 유쾌한 희극을 올리고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다 그런 거야!'라는 진부한 말로 변명을 안 해도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희생을 강요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나의 권리를 쟁취해 가는 삶을 꿈꿨다. 영화를 통해 긴 세월 외면했던 나를 보게 되었다. 주권의 주체인 나로 살고 싶어 꿈틀대는.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때려야 맛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며느리 벙어리 귀머거리 3년.'
자라며 자연스레 접한 이런 말들에 언제부터인지 분노가 치밀었다. 외딴 시골마을에서 자란지라 엄마, 할머니, 동네 아줌마가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받고 설움 받고 사는 걸 일상처럼 목격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 근처에 가본 적 없는 까막눈인 엄마밑에서 배움은 먼 세상일처럼 알고 자랐다. 취기와 치기에 찬 아버지가 돌아오는 저녁이면 엄마와 언니들과 담을 넘어 숨어야 하는 날들을 견뎠다. 겨울이면 노름과 담배연기로 찌들던 한 칸짜리 방. 고성과 술로 흥청이던 동네 아저씨들의 시중을 당연하게 들어야 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였다. 지난한 시간을 건너야 했다.
계집애였던 나의 권리나 미래는 없었다. 성장한 후에 지나온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렵사리 대학과 대학원 간판으로 치장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여자인 나를 냉대했다. 어딜 가나 여자라는 이유로 커피를 타야 했고, 얌전해야 했고, 회식자리에 상냥하게 상사들 술시중을 들어야 했다. '참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참하지 않은 난 그 말에 뾰족 뾰족 가시가 돋곤 했다. '유별나다' '모났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묵언을 수행했다.
결혼 후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엄마, 아내, 며느리로 대부분을 살았다. 다 그렇게 사니 나만 유난을 떨 수 없었다. 당연하고 맞는 길이라 믿었다. 행여라도 나의 권리를 내세워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다. 착한 엄마, 아내, 며느리 콤플렉스로 주권을 저당 잡혔다. 을사조약과 같은 결혼이라는 제도아래 나의 주권을 너무 쉽게 내주었다. 그러다 배우자를 따라 캐나다로 원치 않는 이민을 왔다. 나와 아이들의 의견은 무시된 채. 이곳의 삶은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느냐 눈치가 보이고 거북했다.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삶에 주권을 논하는 건 사치였다.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사고를 당하고 인생에 '불행'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야 했다. 오랜 기간 수술과 재활치료를 받게 되었다. 날개가 꺾여 인생의 바닥까지 내동댕이 쳐졌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나를 외면하며 살았다는 것을. 구차한 변명과 자기 연민으로 '어쩔 수 없음'이란 자기 한계를 만들고 그 안에 나를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나이 사십에 주권을 찾기로 결심했다. 한계에 부딪히니 한계밖이 궁금했다. 배움으로 계몽시키고 힘을 키웠다. 누구 하나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지라 무심히 앞만 보고 걸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그만하면 됐어. 여자가 그 나이에 공부해 뭐 하려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그래. 애들과 남편 뒷바라지나 잘해."
"독한 것, 얼마나 잘되나 두고 보자."
나를 주저앉히려 함부로 말을 쏟아내는 이들을 견뎌야 했다. 휩쓸리지 않으려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무심한 척, 담담한 척, 못 들은 척 나를 보호했다. 내가 나를 배신하지 않으려 했다.
먼 길을 돌아 주권을 찾았다. 아니 찾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인생 독립만세'는 현재 진행형이다. 다 찾은 주권인 줄 알았지만 얼마 전 배우자가 뒤통수를 세게 쳤다.
"캐나다 살아 며느리 노릇 감면된 거 감사한 줄 알아야지. 사실이잖아!"
무심코 던진 그 한마디가 내 안에 잠잠하던 불구덩이에 활화산을 지폈다. 확실히 내 주권을 주장하지 않으면 언제든 내 주권은 빼앗기고 짓밟히고 무시당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별 뜻 없이 던진 한마디가 잔혹했던 시간들을 모두 소환했다.
"내가 며느리 노릇대신 엄마, 아빠, 가장 노릇 한 건? 겨우 며느리 노릇 하지 않았다고 감사하라니? 당신은 사위, 아빠, 가장노릇 면해줬는데 더 감사해야겠네."
나의 날 선 말에 배우자는 대꾸 한마디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그는 멀리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대단한 이유로 책임과 의무를 자연의 이치처럼 면제받고 살았다. 난 여자라는 이유로 남편의 부재에 모든 걸 감당해야 했다. 당연하다고 여겼다. 가족도 주위사람도, 하물며 나조차도.
이제 권리를 넘어 욕망에도 솔직하고 당당하려 한다. 남들이 남사스럽고 무례하다 할 나의 욕망을 떳떳하게 드러내고 싶다. 꿈꾸는 나, 글 쓰는 나, 설레는 나, 발칙한 나, 섹시한 나, 아름다운 나, 유쾌한 나, 천박하고 상스러운 나, 열정적인 나, 감성적인 나, 풍요로운 나... 나의 욕망에 귀 기울이고 쓰담쓰담해주고 싶다. 내가 나를 정의하며 내 선택에 시시콜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싶다. 주권자인 내가 결정하는 나의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