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지 Mar 11. 2024

결혼, 물릴 수 있는 거야?

"또 꽝이야"     

내 결혼 뽑기가 "꽝"이란걸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은 딱 두 달이었다.      

물릴 수 없을까? 티 안 나게 물릴 수 있다면 물리고 싶었다. 혼자 상상해 봤다. 결혼이란 게 책꽂이에 꽂힌 책처럼 제목과 머리말이 맘에 들어 읽게 되는 것과 같다고. 속속들이 알 수 없는 게 사람인지라. 결혼이란 게 몇 장 넘겼는데 막상 내 취양이 아닐 때  책꽂이에 다시 그대로 꽂아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뽑기에 재능이 없다. 자의에 의한 뽑기든 타의에 의한 뽑힘이든, 인생에 그냥 ‘공짜’처럼 또는 ‘기적’처럼 오는 그런 ‘뽑기’ 또는 ‘뽑히기’에 주인공이 된 적이 없다. 오락실에서 하는 인형 뽑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행사 때 그 흔한 선풍기 한대  뽑힌 적이 없다. 그래서 주식이나 복권 같은 건 애당초 살 엄두를 내지 않았다. 시험을 볼 때 모르는 답에 남들처럼 펜을 굴려 답을 맞혀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공부한 만큼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덜 점수를 받으면 다행이라 여겼다. 요행을 포기하고 살았다. 저절로 오는 ‘복’은 내 인생엔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나를 세상에 뽑아준 부모님도 시골 근근한 농부인지라, 내 인생은 남들이 말하는 ‘흙수저’로 시작했다. 대학 내내 스스로 학비를 대고 용돈을 벌어야 해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외국여행이나 유학연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요행을 포기한지라 백마 탄 왕자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생김새도 미인과 거리가 먼지라 그런 복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저 부지런히 일하고 공부했다. 매사에 노력의 총량 치를 들이밀었다. 그나마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결과를 보여주거나 원하는 삶을 짠하고 선물하지 않았지만, 부단한 노력은 언젠가는 작든 크든 보상을 해줬다. 끊임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잘 되겠지란 믿음을 갖고 살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애와 결혼은 나의 이런 믿음을 철저하게 저버렸다. 인생의  가장 눈부셔야 할 대학

1학년 때 뽑은 첫 연애는 내 인생의 가장 심각한 “꽝”이었다. 미팅 한번 못하고 6년이란 세월을 온전히 첫 연애에 바쳤다. 20대 초반의 빛나야 할 나의 연애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씁쓸함과 악몽만 남긴 채 끝났다. 그 뒤 몇 번의 연애도 재미를 못 봤다. 남자 보는 재능이 없던 나는 늘 ‘꽝’ 아니면 ‘본전치기’였다. 연애와 노력은 절대 나란히 가지 않았다.  나를 헌신하면 상대는 뒷걸음질 쳤다. 밀당에 재주 없던 난 직진형이었다. 상대패를 확인하지 않고 셈도 따지지 않고 나를 던졌다.      

          

노력의 대가가 없던 씁쓸한 연애에 지친 난, 배우자는 내 기준에서 신중하게 골랐다. 물론 세상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이었다. 늦은 밤공부를 끝내고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게, '삐삐'에 시 한편씩 녹음해 주던 그가 좋았다. 그와 함께라면 평생을 감성부자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자타가 인정한 문학소녀였던 난 돈부자보다는 감성부자로 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생긴 것도 직업도 멀쩡해 보였다. 그동안 밑지는 연애에 보상을 받고 싶던 난 배우자의 면모를 나름 살폈다. 그는 매달 월급을 타면 내게 작은 선물 하나씩을 해줬다. 자상하고 살뜰해 보였다. 몇 번의 연애에 그 흔한 초콜릿이나 목걸이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나는 그의 소소한 선물에 설레고 감동했다.  

              

그는 한창 건축물에 심취해 있던 나를 '심쿵'하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      

"으음, 보아하니 저건 르꼬르뷔제에 롱샹성당 양식인데!"      

드라이브를 하던 중 그가 툭 내뱉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경이로웠다. 주위에 <르꼬르뷔제>를 아는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그 시절, 지적허영심이 대단했던 나는 분별력을 잃었다. 저음으로 시를 읽어주는 그에게, 예술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어린 왕자 같은 그의 순수함과 순진함이 좋았고, 인생에 고뇌하는 그가 아름다웠다.  난 연애 8개월 만에 그와 결혼을 했다.  

             

자나고 보니 용감 무식했다. 시누이 셋에 종갓집 장손에 외아들인 그의 청혼에 단 일초의 망설임 없이 "yes"했으니. 결혼 후, 감수성이 풍부해 시를 좋아하고, 어린 왕자 같이 순수한, 인생을 고뇌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가, 사실은 예민하고 철이 없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민한 그의 감정은 종잡기 힘들었다. 그의 기분은 그네 타듯 오르락내리락했다. 순수하고 순진한 그는 눈치가 없어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사건사고를 종종 만들었다. 뒤수습은 온전히 내 차지였다. 친구나 친정식구, 하물며 시댁식구를 초대하는 것도 신경 쓰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였기에.     

            

순수하고 눈치 없는 그가 어느 여름 뜨거운 태양아래서 말했다. 본인 꿈은 '효자'라고. 어머니를 모셔와 살아야겠다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그는 어머니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어머니와 단둘이 여행을 다니고 긴 전화통화를 종종 하곤 했다. 카톡에 프로필 사진도 어머니로 바꿨다. 그러려니 했다. 크게 맘 쓰지 않았다. 한편으론 착한 그가 기특해 보였다. 그러던 그가 대놓고 어머니와 살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직장으로 떨어져 산 배우자는 파트타임(part-time) 남편도 되지 않았다. 온콜(on-call) 정도의 남편역할만 했다. 그랬던 그가 남편으로 책임과 의무는 등지고 풀타임(full-time) 아들로 살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돌아보면 결혼을 서둘러했다. 나름 신중했다고 하지만 이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주는 결혼이라는 압박과, 대학 후 진출한 사회에서의 낮은 자기 효능감에 좌절하고 있었다. 사회에서 여성으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이 아닌 공부라는 비전통적 진로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막상 졸업을 하고 달랑 모아놓은 돈으로 유학을 갔다 오면 나이 30이 넘을 텐데, 과연 직업을 구할 수 있을까? 빈털터리에 30이 넘은 노처녀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꿈과 현실사이에서 방황을 하고 있었다. 


"미스 장, 커피 좀 타와."     

대학 졸업 후 산업 디자이너로 첫 직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성차별, 허드렛일, 성희롱의 대상이 되었다. 커피 심부름에 회식 땐 늘 상사들 옆자리에 앉아 비유를 맞춰야 했다. 팀에 고등학교와 전문대를 나온 나보다 어린 남자 직원이 두 명 있었다. 하지만 유일한 여직원이란 이유로 커피심부름은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내게 떨어졌다.  이년을 일하며 나의 커리어 정체성에 대해 수많은 의문과 좌절을 했다. 그 후 나은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에 자격을 더 갖추려 대학원에 갔다. 조교로 일하며 석사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주위 교수님들조차 ”여자가 부잣집 남자 잘 만나 시집가면 되지 뭐 하러 공부는 해?"라는 말을 했다. 

             

발버둥 쳐봤지만 꿈과 현실의 간극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인생에 큰 용기 한번 내보지 못하고 결혼이라는 전통적 거래를 했다. 소낙비 같이 불안했던 이십 대, 결혼으로 그 비를 피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몸뚱이 하나 말고 믿을 게 없던 난 결혼이라는 겉보기에 그럴싸한 안전한 거래를 했다. 그땐 몰랐다. 그게 얼마나 손해 보는 나쁜 거래인지. 결혼해도 내 꿈을 좇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늦가을, 감나무 그림자가 달빛에 길게 창문에 드리우던 밤, 그는 내게 청혼했다.  달빛을 타고 속삭이던 그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맴돈다.       

"결혼 후에도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지지해주고 싶어. 나랑 결혼하자!"   

그의 말에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yes"했다. 털끝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문학을 좋아하고 예술을 꿈꾸는 그가 내 꿈의 지지자가 돼줄 거라 굳게 믿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말한 지지는 내가 돈 벌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이었다. 살림은 온전히 내가 다 도맡아 해 가며.  물론 직장을 다니는 건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종갓집 외며느리로 모든 살림과 시댁의 경조사까지 떠안게 되었다.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꼴이었다. 결혼이란 제도아래 책임과 의무만 덧씌워졌다. 권리나 보호는 배제된 체. 물릴 시기를 놓친 건지, 물릴 용기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미련했던 건지 잘 모르겠다. 결혼의 맨 끝자락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던 난, 더 깊은 늪으로 빠지고 있다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이전 01화 내 인생 독립만세! 주권을 찾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