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이보다 더 완벽한 나이가 있을까? 비로소 온전한 나를 만났어."
나의 패기 넘치는 말에 운전하던 배우자가 씩 웃는다.
“당신이 30,40대에는 당신 삶을 그리고 나이를 별 얘기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랬던 것 같다. 소나기 같던 20대를 지나 30, 40대를 건너며 난 나의 삶을 간과하고 살았다. 늘 불안했고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걸친 듯했다. 20대 땐 누군가의 인생을 흉내 냈던 거 같고, 30, 40대엔 배우자와 아이들의 삶이 내 삶이었다. 오랜 세월을 돌아 이제야 나를 이해하고 보살펴줄 여유가 생겼다. 내 삶에 주어진 시간과 열정을 나를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20대 땐 터질듯한 열정과는 다른 현실로 많은 방황과 시행착오와 헛발질을 했다. 삶의 무기력함에 휘청거리며 마음 한편이 늘 울렁거리던 20 대를 보냈다. 내가 꿈꾸던 세상과 다른 현실에 혼란스러워 가난한 시간을 보냈다. 쓸데없이 너무 분노했고, 앞장섰고, 그래서 깨졌다. 치기가 넘쳤다. 창자를 비트는 듯한 고통을 은근 훈장처럼 즐겼던 것 같다. 술을 퍼마신 날 새벽에 일어나 느끼는 거대한 갈증과 속 쓰림과 같은 고통이었다. 치기가 있어 가능했던 고통이었다.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가 나를 좀 잠잠하게 눌러 줄줄 알았다. 이십 대의 불안함이 서른이 되면 종식이 될 줄 알았다. 꿈과 현실의 간극이 확 줄어들거라 믿었다. 더 이상 들끓는 욕망과 방황 없이 삶이 안착이 되는 줄 알았다.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처럼 내 인생의 잔치는 끝나고 나른하고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으로 가는 줄 알았지만 서른이란 나이는 나를 끝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늪으로 데려갔다. 계속 꿈틀대는 욕망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난 괴로웠다.
그러다 인생에 큰 용기 한번 내보지 못하고 남들이 다하는 결혼이라는 걸 했다. 그러다 30대는 엄마와 아내, 그리고 며느리로 살았다. 40대엔 남편을 따라 무작정 온 캐나다란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다. 이십 대 때 가졌던 끝도 보이지 않던 불안을 40대 때 다시 조우했다. 외국살이는 모든 게 막막하고 두렵고 새로웠다. 두 아이를 키우며 생존을 위한 오랜 공부와 직장생활을 했다. 속절없이 몰아친 운명에 나를 깊이 들여다보고 살펴줄 여유가 없었다. 나의 욕망이 사치처럼 느껴지던 때였다. 욕망을 애써 외면하며 살았다.
50이 되어서야 난 내 욕망을 조금은 편하게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낯선 날것의 욕망들에 더 이상 괴롭거나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욕망을 직시하며 더 이상 숨기지 않으려 한다. 아니 내 욕망을 드러내고 싶어졌다. 내가 살아있다는, 숨 쉬고 있다는 증거다. 나이를 먹어도 나의 욕망은 계속되고, 난 이젠 이런 욕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한다. 성숙하지 않다 해도 괜찮다. 소란스럽다 해도 괜찮다. 점잖지 않다 해도 괜찮다. 치우쳤다 해도 괜찮다. 이기적이라 해도 괜찮다.
욕망을 갖고 산다는 건, 그만큼 삶에 진심인 것이다. 살아 숨 쉬는, 팔딱거리는, 생생한 삶을 원한다는 것이다. 욕망이란 단어가 주는 B급 감성 때문일까? 사람들은 욕망이란 단어를 삼류소설이나 아침 드라마에서나 쓰는 단어로 취급을 한다. 욕망이란 단어는 싸구려처럼 천박하게 때로는 더럽게 여겨져 왔다. 하지만 욕망의 뜻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이다.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채워가며 사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해지기 위한 기본 중에 기본이다. 성욕, 식욕, 배변 욕구같이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을 채워야 우린 비로소 그다음의 단계를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욕망이 끊임없는 탐욕이나 욕심으로 가는 건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욕망은 채워지면 끝나는 지점이 있지만 탐욕이나 욕심은 끝이 없으니 말이다.
참된 clinician 이 되고 싶은 욕망,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 글을 쓰고 싶은 욕망, 멋진 작가가 되고 싶은 욕망, 멋지고 매력적이게 나이 먹고 싶은 욕망,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 풍요롭게 살고 싶은 욕망, 평생을 배우고 싶은 욕망! 그런 욕망들에 떳떳해지고 싶다. 숨이 멎어야만 끝날 것 같은 욕망의 잔치를 난 지금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나이 50에 들어 갖게된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나만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쓰며 살고 있다. 물론 요리나 집안일 돈 버는 일은 계속하지만 30대 40대에 비해 나에게 쓸 수 있는 총량의 시간과 돈이 몇 배 늘었다. 주권을 회복한 8.15 광복절처럼 50이 되어 내 삶의 온전한 주권을 되찾아 가고 있다. 오랜 세월 내 삶의 주도권을 가족과 사회에 내줬다. 세상의 의무와 책임과 한계와 타협하며 무덤덤하게 살았다. 하지만 지금의 난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내가 내 삶에 자주적 결정권과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며 경제적 정신적으로 독립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남들은 50에 갱년기가 와 우울하고 여기저기 아프다는데, 난 더 활기차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하루하루가 설렌다. 남들은 세월에 인생의 주도권을 내주려 할 때, 난 내 온전한 욕망으로 작가가 되기로 결정했고 하루하루를 미련할 만큼 부지런한 사랑을 글쓰기와 하고 있다. 난 정말 완벽한 나이를 살고 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이보다 더 풍요롭고 견고할 수 없다. 이 완벽한 나이는 60대에도 70대에도 계속될 것이다. 우린 세월에 우리의 꿈을 너무 쉽게 내어주는지 모른다. 스스로 자기한계를 만들며. 사회가 만든 한계에 너무 쉽게 타협하며.
“널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너와 보낼 시간에 마음이 콩닥거리고, 네가 내게 다정하지 않은 날은 맘이 너무 속상해. 길을 가다 문득 네가 떠오르고, 운동을 하다가도, 잠자리에 들면서도 네 생각만 나."
지난겨울, 생각지도 않은 짝사랑을 하게 되었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훅’ 들어온 사랑에 당황스웠다. 미리 귀띔이라도 주지. 한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설렘에 마음이 콩콩 뛰었다. 겨울밤 하염없이 쌓이는 눈같이 속절없는 짝사랑에 애가 타 마음을 한참 앓았다. 상대는 나에게 맘 한편 내놓을 생각도 하지 않는 데다 무심하기까지 했다. 상대 속을 알 수 없고, 밑이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 안달이 났다. 너무 밑지는 사랑을 하는가 싶어 은근 속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의 짝사랑은 멈출 것 같지 않다.
"What a beautiful life!"
50 연가를 부른다. 이보다 더 완벽하고 아름다울 수 없다.
심장이 멈춰야 끝날 나의 욕망의 잔치는 진행형이다. 글쓰기에 대한 짝사항과 함께. 나의 첫 브런치북을 구독해 준 모든 분들께 봄햇살 같은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다음글로 만날 때까지 봄밤같이 설레는 날들 되시길, 그리고 다시 꿈꾸며 재회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