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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Jul 15. 2024

여행이 시작되는 곳

공항에 대한 추억

  10년간 걸어간 길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길이 있다. 어젯밤 분명히 일찍 잠든 거 같은데 눈꺼풀은 어찌나 무거운지 계속 내려온다. 지하철에서 앉을자리를 찾아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지만, 자리는 나지 않는다. 다들 나와 같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멍하니 스마트폰만 쳐다본다. 누구 하나 잘못 건드리면 화가 날 분위기가 지하철을 감싼다. 오늘도, 내일도 떠나야 하는 그 길은 바로 출근길이다.

 반면에 목적지인 그곳을 생각만 하더라도 즐거운 길이 있다. 비록 전날 늦잠을 잤어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첫 차를 탈 지라도, 눈에는 생기가 돈다. 앉을자리가 없어 내내 서서 가도 즐거운 길.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즐거움에 상기된 표정으로 가는 길. 바로 공항 가는 길이다.


 ‘공항’이라는 단어 만으로도 주는 설렘이 있다. 새로운 장소로 떠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낯선 장소로 도착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돌아오는 장소,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혹은 도착한 사람들을 기다리는 장소인 공항. 이런 공항에 가는 것만으로도 마치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예전에 어떤 예능에서 한 배우는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공항으로 여행을 떠난 다고 했다. 공항에 가는 길 그리고 공항 자체가 주는 설렘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그 짧은 여행이 주는 설렘은 비행이 주는 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나는 국외로 떠날 때 주로 인천공항을 이용한다. 인천공항에 대한 첫 추억은, 공항 자체에 대한 여행이었다.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에 큰 국제공항이 들어섰다는 뉴스를 만나게 된다. 그전까지는 서울에서 출발하는 모든 국제/국내 노선이 김포공항에서 이루어졌을 때다. 나는 아직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던 어린이였다. 당시 새로 생긴 공항은, 그 자체만으로 관광 콘텐츠였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큰 시설이 생긴 것 자체가 구경거리였다. 우리 가족들도 공항을 구경 가기로 하였다. 사촌오빠가 운전한 차를 타고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외조부모님까지 대규모의 가족들이 다 같이 공항을 구경 갔다. 넓고 깨끗한 시설, 붐비는 사람들,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외국인들 까지, 어린 내가 봐도 이런 별천지가 없었다. 그때는 외국으로 여행하기 위해 공항에 가는 순간을 상상하지 못했다. 마치 서울에 오면 63 빌딩을 구경 가듯이, 그저 하나의 랜드마크로서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공항의 진짜 목적, 비행을 위해 공항을 찾게 된 것은 좀 더 이후의 이야기이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가게 된 해외여행. 심지어 국내선도 타보지 않은 나에게 여행 전 큰 산은 공항 그 자체였다. 공항에서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공부하고 갔다. 심지어 환승도 해야 하기 때문에 걱정이 더 컸다. 공항으로 가는 전철에서 설레다 못해 걱정으로 가슴이 터질 거 같았다. 여권을 잃어버리는 상상을 하면서 계속해서 여권을 손으로 만지면서 이동했다. 사람이 많은 공항은 너무 복잡했지만, 안내를 따라 길을 걸으니 걱정하는 것과 같이 길 잃는 이슈는 발생하지 않았다. 발권을 하고 출국심사대에 섰을 때는 아직 군대에 가지 않았던 내 동생이 출국을 원활하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렇게 과도한 상상으로 빚어낸 걱정을 비웃듯, 나는 무사히 그리고 원활하게 면세지역에 들어왔다. 내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늦은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면세점이 문을 닫았고 때문에 구경할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것에 대한 아쉬움은 별로 없었다. 출국심사를 무사히 미치고 비행기 게이트 앞에 서기라는 미션을 수행한 나 스스로가 대견한 마음뿐이었다. 비록 환승과 입국심사라는 또 다른 미션이 남아있었지만, 그 순간은 순수하게 공항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최종 목적지. 첫 국외 공항에서는 잔뜩 긴장한 채 이동했다. 입국심사장에서 보이는 외국인들과 유창한 외국어들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입국심사대에 앉아 있는 직원이 마치 면접장에 있는 면접관처럼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공부했던 사항을 계속해서 되네이며 입국수속대에 섰다. 기본적인 질문들(비행 목적, 기간, 체류호텔 등)은 미리 공부하고 갔음에도 엉뚱한 대답을 하곤 했다. 생각해 보면 크게 어렵지 않은 영어였음에도 말이다. 겨우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고 나왔을 때 나의 여행이 현실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이 공항에서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는 것이 다시 공항에서 주어진 새로운 여행 미션이었다.  


 여행이 여러 번 이뤄지고 나니 공항은 더 이상 어려운 도전의 장소가 아니었다. 더 이상 공항에서 길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고, 발권수속은 너무 손쉽게 이루어졌다.(심지어 이제는 모바일로 모든 것을 끝내고 있다.) 어느새 공항은 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어느 순간에는 새로운 안내 로봇이 공항에서 쉽게 보이게 되었고, 어느 순간에는 기계로 발권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여러 번 해보니 별거 아닌 것들이었다. 입국 심사에서도 이전처럼 긴장하지 않는다. 물론 첫 비행처럼 많은 질문을 하는 곳이 별로 없는 것도 있지만 이미 많이 익숙해진 절차를 더 이상 떨면서 걱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걱정이 사라진 자리는 설렘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항에 가는 것 자체가 여행이 되어버렸다. 공항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난 후에 커피 한잔 하는 여유, 면세지역을 구경하고 선글라스 하나 구매하는 즐거움, 이륙하는 비행기들을 보면서 나의 비행에 대해 기대하는 설렘까지.

 몇 달 후면 나는 또다시 공항으로 떠날 것이다. 여행이 시작되는 그곳으로 말이다. 이번에는 라운지도 이용해 볼 예정이다. 점점 더 공항에서 할 수 있는 즐거움이 많아졌다. 또다시 가게 될 나의 여행지가 다시 설레어지고 있다.


 이보다 멋진 여행지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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