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 재력 그리고 경험
대학생 시절 유럽여행을 떠난 것을 기점으로, 나는 매년 여행을 열심히 다녔다. 시간이 많았던 학생 때부터 겨우 연차를 내고 떠날 수 있는 지금까지, 친구, 가족 그리고 혼자서 부지런히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 이전에는 매년 1회 정도는 해외에 갔고 코로나가 있는 시기에는 조심스럽게 국내 여행을 다녔다. 이렇게 매년 조금씩 여행을 다니다 보니 어느새 내 나이가 30대 중반이 되었다.
20대 초반 했던 여행과 지금 30대 중반의 여행은 분명 차이가 있다. 20대와 30대 여행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한다면 모두가 예상한 그것, 체력이다. 60대가 되신 우리 부모님도 여행을 다니니 30대가 체력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쩌면 건방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30대가 되면 체력이 깎이는 경험을 할 것이다. 20대 때는 꼭두새벽부터 여행을 시작해 밤에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야경을 즐기는 일정이 가능했다. 8시에 숙소에서 나와서 저녁 9시까지 돌아다닐 수 있었다. 많이 걷다 보면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팠지만, 자고 일어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다시 체력이 회복된 것이다. 심지어 야간열차나 버스 등을 이용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게 조금만 자도 다시 샤워를 하면 체력이 회복되었다. 물론 이 체력은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가능했던 것도 있다. 평상시에는 이 정도 일정을 소화하기 힘들었지만, 한 번뿐인 여행을 좀 더 악착같이 즐기겠다는 마음가짐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30대가 되면서 내 여행 가방에 이전에 없던 물품들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바로 각종 영양제와 피로회복제이다. 특히 여행 일정이 길어지면, 평소에는 먹지 않던 더 강력한 피로회복제를 가져간다. 또 30대가 되면서 20대 때보다는 좀 더 몸을 사리면서 여행을 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여행지에 상비약을 챙겨가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소화제며 감기약 등이 왜 필요한지 이해 못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전에 비해 상비약을 더 열심히 챙기는 편이다. 몸이 피곤한 상태에서는 더 쉽게 체하거나 감기에 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여행 중간중간 쉬는 일정을 꼭 넣게 되었다. 성격이 바뀌지 않아서 예전처럼 8시에 숙소에서 나서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예전보다 덜 걷고, 더 쉬는 일정을 소화한다. 이왕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카페 등에서 시간을 길게 보낸다. 혹은 숙소가 연박이라면 중간에 잠깐 들어와서 낮잠을 잔다. 예전 같으면 아까운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라 여겼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충한 체력이 더 즐겁게 여행하는데 쓰이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덜 걷고 더 쉬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전에 비해 여행경비가 더 많아졌기에 가능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가까운 거리면 굳이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았다. 특히 택시 같은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10분만 걸어가면 갈 수 있는데 돈을 소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는 택시 이용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버스 같은 대중교통도 적절히 이용하지만 예전에 비해 금전적인 이유로 택시를 거부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우버, 그랩 같은 어플로 인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좀 더 용이해졌다는 이유도 있다.
20대에는 숙박시설에 돈을 많이 투자하지 않았다. 어차피 8시에 나와서 9시에 들어올 텐데 잠만 자는 숙박시설에 돈을 투자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숙박시설은 그저 적당히 깨끗하고 적당히 대중교통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 상관없었다. 특히 게스트하우스 같이 저렴한 숙박시설을 선호했다. 극 I 성향인 나는 남들과 방을 쓰는 게 너무 불편했지만, 돈을 아끼는 것이 성향을 뛰어넘었다. 지금은 숙박시설을 고르는 것이 좀 더 까다로워졌다. 동시에 비용도 더 투자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행 갈 때 5성급에 좋은 호텔로 다닌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보다 숙박시설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더 늘었다는 것이다. 일단 게스트하우스는 고려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돈이 조금 더 들어도 침대는 2개 이상 있는 방을 선호한다. 가족들끼리 여행 갈 때는 아예 방으로 구분되어 있는 숙박시설을 찾는다. 기왕이면 숙박시설의 시설들이 좋은 곳을 고른다. 수영장이며 조식 서비스가 좋은 곳은 돈을 조금 더 내더라도 갈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몇 만 원 차이밖에 안 난다면 이왕이면 성급이 높은 호텔을 고른다. 예전에 비해 무조건 가격으로만 숙소를 정하지 않는다. 숙박시설에 머무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 늘어난 것도 이유이지만, 여행지에서 호텔 혹은 펜션 등에서 머무는 것도 여행의 일부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관광시설, 맛집, 멋진 카페에 가는 것 만이 여행이 아니라, 호텔에 머물면서 조식을 먹거나 침대에서 잠깐 쉬거나, 가벼운 군것질을 하면서 친구들과 수다 떠는 그 순간도 여행임을 알게 되었다.
30대의 여행은 20대에 비해 여유가 생겼다. 20대 때 여행은 겨우 모은 돈으로 겨우 여행을 떠났다. 내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알지 못하기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여행을 다녔다. 그래서 완벽한 여행을 하고 싶었다. 여행 전부터 꽉 찬 일정을 준비하고, 며칠 전부터 여행에 필요한 짐들을 쌌다. 빡빡하게 짠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아픈 다리에 휴족시간을 붙이고 밤늦게 침대에 누워야 만이 만족한 하루를 보낸 것으로 여겼다. 이 여행지에서 남들이 가는 모든 곳들을 가고 싶었다. 파리에 왔으면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짧은 시간 내에 그것을 해내야 했다. 파리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것을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남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심지어 나 자신이 즐겁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물론 아직도 여행 일정은 꽉 차게 짜는 편이다. 하지만 여행 계획에 언제나 빈칸을 같이 넣어둔다. 여행지에서 가야 하는 곳은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 짜고 나머지 일정은 자유시간으로 둔다. 자유시간에는 체력이 허락한다면 다른 곳을 가기도 가고 혹은 현지인처럼 공원에서 잠시 멍을 때리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여행 계획이 이전에 비해 빈칸이 많으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일정을 모두 완료해야 한다는 초조한 마음이 없어졌다. 동시에 해당 여행지에 온 것이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물론 이 여행지에 다시 오는 것이 힘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에펠탑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이 아니라 내가 파리에서 느끼는 감정이니까 말이다. 내 여행을 단지 할 일을 해내는 것으로만 정의하고 싶지 않아 졌다.
사실 이 모든 게 경험치가 쌓여 이루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여행 경험이 부족했던 시기에는, 남들처럼 아니 남들보다 더 완벽하고 가득 찬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성공한 여행처럼 보였다. 사실 여행에 성공과 실패가 없는데, 그것을 알지 못했다. 경험을 통해 여행이 꽉 차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경험으로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30대 여행이 20대와 다른 것처럼 40대의 여행은 30대와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30대의 여행은 여유로워졌고, 좀 더 능숙해졌지만 동시에 과거에 비해 체력적으로는 힘들어졌다. 40대가 되면 여행이 좀 더 여유로워 질까? 아니면 이제 많은 곳을 가봐서 여행의 흥미가 떨어지게 될까? 아니면 그때에는 어쩌면 또 다른 재미가 기다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