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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 - 만남

05. 만남

by 왕십리


3월 11일


재호는 아들과 며느리의 관계로 무거운 마음으로 이천으로 내려가는 버스에 올랐다.

출발 시간이 임박했지만, 버스 안에는 승객 몇 사람밖에 없어 빈자리가 많았다. 그런데 그의 좌석에 이미 누가 앉아있었다. 30대로 보이는 여자로 꽤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예 옆자리에 코트와 가방을 놓고 핸드폰을 보면서 태연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는 자리의 번호와 자신의 표를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저 여기 제 자리인데요. 자리 번호 맞으세요.”

그녀는 상대방 얼굴을 보지도 않고 뒤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빈자리도 많은데...”

그녀는 일어날 생각을 않고 금방 갈 거리인데 편하게 그냥 빈자리 아무 데나 앉아 가면 되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지정된 자리에 앉아야지요.” 그는 기분도 안 좋은데 그녀의 태도에 짜증이 났다. 그녀가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거나 미안하다고 일어나는 시늉만 했어도 그냥 받아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은 것은 물론 여자 인 데다 얼굴이 반반하고 나이도 젊다는 것에 더 반감이 들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옷과 가방을 챙기고 컵걸이에 커피도 들고일어나 뒤쪽 아무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가는 동안 불편하고 씁쓸한 기분과 간질거리는 뒤통수는 어쩔 수 없었다. ‘흥 늙은 쪼잔한 남자’ 콧방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차는 목적지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상하게 궁금해지면서 뒤를 한번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냥 무시하는 듯 먼저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찾아 걸어갔다. 택시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앞을 지나가는 외제승용차에 앉아있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운전하는 남편인듯한 남자와 나란히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 인상적이다.

‘흥 예쁘면 뭐 해 머리가 텅 비었는데.’ 그는 거듭 비위가 상했다.



3월 16일


아직 날씨가 싸늘해서인지 이곳 저수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낚시터로는 별로라고 하지만 산과 물 그리고 나무들, 잘 어우러진 풍광이 화폭의 분위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우선 그는 그림과 낚시도구를 챙겨 근처 동쪽, 남쪽으로 상상의 장소를 찾아다니며 풍경 속에 기다림의 여유를 보여주려 하였다.

그림과 낚시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즐기기는 어려울 것 같았지만 한 작업만의 지루함을 보완하여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장점도 있는 것을 배웠다.

물결에 하염없이 흘러가는 듯한 찌를 바라보며 어렸을 때 부모님이 불화로 어머니가 가출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고 처음 낚시터를 갔던 때가 생각난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 지저분한 풀밭에 앉아 아버지 눈치만 살피는 지루함과 불편함 때문에 거부감으로 시작했던 낚시였었다.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하루도 마음이 편안한 날이 없었던 직장생활, 자식들 성공시켜 출가시키는 의무감, 노후에 편안하게 지낼 준비 등 이러한 압박에서 이젠 벗어나 이젠 오로지 내 남은 생을 최대한 만족스럽게 살아야 한다, 과연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한편 이런 생활을 꿈꾸며 이제까지 달려오다 넘어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옥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형주를 생각하면 너무 호사를 떠는 자신이 아닌가 하는 미안함이 들었다.

순간 찌가 사라졌다. 번개같이 낚싯대를 잡아챈 오른팔을 타고 오른 전율이 심장을 두드린다.



3월 25일


그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마을 어귀에서 자신의 집을 보면서 늘 형주를 생각했다. 같은 학교에서 같이 배웠는데 형주의 건축에 대한 감각이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집을 계획하고 지었다면 이런 멋을 과연 누릴 수가 있었을까' 그는 풍성한 야산과 푸릇 거리는 들 속의 전원주택을 컨버스에 담아 친구의 병상 앞에 걸어준다면 위로가 될 것 같았다. 토요일, 그는 즉시 붓을 들었다. 의외로 붓칠이 가볍고 부드러웠다. 좋아할 친구를 생각하며 더욱 간절한 마음이 나타나 주길 바랐다.


3월 26일


이곳은 그림 재료를 파는 전문화방이 없어 불편하다. 그는 캔버스가 필요해 급한 대로 일반문구점에 들러보았다. 예상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직원에게 물어보기 위해 카운터로 갔는데 그곳에 환하게 빛이 품어나고 있었다. 계산대에서 손님과 대화하고 있는 여자, 금방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아~ 저 여자! 머리 모양이 다르고 안경을 꼈지만 분명 버스에서 만났던 그 여자다.’ 그때에도 미모가 보통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오늘 본 그녀의 아름다움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섰다. 순간 갑자기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에 당황한 데다 고고하기까지 한 그녀 표정에 쉽게 말을 걸 자신이 없었지만, 평소 본인의 외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는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빈손으로 머뭇거리는 손님을 본 그녀는 먼저 말을 걸었다

“뭘 찾으세요? “ 예상외로 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 예 혹시 유화용 컨버스를 좀 구할 수 없을까요.”

“아! 그것은 없는데요. 아마 서울 가셔야 할 거예요.” 그녀는 다음 손님을 상대한 후 아직도 가지 않고 서 있는 그에게 다시 말을 건넨다.

“화가이신가 봐요.”

“예 화가는 아니고 그림을 좋아합니다.”

“혹시 당장 필요하세요. 낼 오전에 우리 납품 차량이 오는데 괜찮으시면 그때 기사한테 사 오라고 하면 되는데요.”

“아~ 그렇게 해 줄 수 있습니까?”

“정말 고맙네요.”

“아닙니다. 차가 오는 길에 잠시 들려오면 되는데요.”

“그럼 여기에 몇 호짜리 몇 개인지 적어 주세요.”

그녀도 미술에 관심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뒤 벽 달력에는 샤갈 그림이 걸려 있었다.

거듭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오는 그의 발걸음은 들떠 있었다.

‘사람이 저토록 매혹적 일 수가 있을까, 이상하다,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일까. 그녀와 그렇게 대화한 것이 뭐가 대단하다고 이렇게 흥분하는 것인가.’ 생각해 봐도 자신의 그런 심리를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우연히 좋아하는 스타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잠깐의 황홀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다만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평생 만나본 여자 중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 여자가 그런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지난번에도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는 왜 저 여자를 보지 못했지?’


3월 27일


아침부터 바빴다. 혼자 머리도 다듬고 면도도 하고 옷도 신경 써 차려입었다. 향수도 뿌렸다. 조금 더 젊어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쑥스럽기도 하면서, 호감 있는 상대 앞에서는 잘 보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물건은 찾기로 한 시간에 왔는데 카운터에는 그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은 직원이 가리키는 곳에는 컨버스 묶음이 있었다. 포장에 36,000이고 쓰여있었다. 돈을 지불하면서 그녀에 관해 물어보았다.

“어제 일 보던 분은 안 나오셨어요?”

“아~ 사장님요, 사장님은 수요일만 나오세요 “ 그곳은 그 여자가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경 써서 준비하고 나온 자신 꼴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 음 수요일에만 출근한다고!‘



4월 5일


수요일에 맞춰 방문하여 그 여자와 눈인사를 나누거나 말 한마디라도 건너고 나오면 온종일 기분이 좋았고 그녀가 보이지 않은 때에는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일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재호는 문구점 갈 구실을 찾아 시간을 보냈다. 형주도 생각하면서 앞으로 필요한 문방구와 그림 그리는 재료 등을 미리 구매하여 화실에 쌓아 두기도 하고 시청 문예반에 문구 용품을 찬조하기도 했다.


그는 시청을 찾아갔다, 마침 점심때라 음식점으로 후배를 불러냈다.

“선배님 웬일이세요.” 후배는 의아한 표정이다.

“고 과장 별일 없지요. 나 좀 알아 볼일 있어서, 각 부서의 문구 용품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 조달하고 있어요?”

“예 총무부에서 일괄구매 한경우가 있고 부서별로 각자 구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

“그럼 지역에서 구매하는 문구점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고요, 각 구매 담당이 가격을 비교해 편리한 곳으로 정해서 거래하고 있습니다.”

“그것 잘됐네, 혹시 내가 문구점을 한 군데 추천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선배님이 추천하신다고요? 어떻게 잘 아시는 곳이 있는 모양이죠, 그게 어디인데요?”

“아! 정원 문구점이라고 저 아래 다리 건너기 전에 있는 집인데.”

“아! 정원요? 선배님이 그곳을 어떻게 아세요?”

“내가 그 집에 신세를 지고 있어 좀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요.”

“그 집이라면 제가 잘 알죠. 저하고 친척도 되고요, 아무튼 염려 마세요. 그런 것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뿐 아니라 시청 전 부서가 그 집만 거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집 여사장이 미인이라 그런지 다들 요 앞 문구점을 마다하고 그 집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 여사장 미모뿐 아니라 시댁의 재력이 막강해서 아마 돈 때문에 문구점 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 여자가 취미 생활로 하는 것 같은데 선배님이 신경 안 쓰셔도 될 겁니다.”

그는 무안했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혼자만 모르고 뒷북치는 꼴이었다. 나이 든 남자가 미모의 처자에 정신을 빼앗겨 망년 된 속마음을 숨기고 주제넘은 짓을 하다 들킨 양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후배한테 들은 집안의 배경은 그를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했다.



4월 8일


재호 아내는 며느리에게 힘든 생활에 대한 위로와 철없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그러면서 휴일에 시내 호텔에서 가족들과 식사하면서 하룻밤 지내다 올 것을 제안했다. 아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그날 손주와 함께 나온 아들 부부는 표정도 밝고 곧잘 웃기도 해 재호 부부를 안심시켰다. 지연이도 이런 식사가 오랜만이라며 즐거워하자 분위기가 한결 좋았다.

지연아! 그동안 서로 바쁘다 보니 우리가 같이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하루 이틀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우리 앞으로는 자주 시간을 갖도록 하자. 어때?”

“감사합니다. 저는 좋지요. 다음에는 아가씨 부부도 같이 오도록 해요”

“물론이지, 오늘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너희 부부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마음껏 즐기도록 해라”

아들 부부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도록 재호 부부는 풀장에서 손자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모든 분위기가 흡족하여 좋은 결과가 기대되었다. 그러나 둘만의 잠자리를 위해 손자를 할머니와 함께 재우려던 시도는 손자의 반발로 결국 며느리에게 붙여 들여보내는 바람에 실패했다. ‘요령껏 하겠지’ 아들 부부 잠자리까지 어떻게 해보려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지연아! 너 그 옷 신혼 때 입었던 거 아니냐. 아직도 그 옷을 입고 있어? 세상에! 너는 도대체 뭐 하냐? 아내가 집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뭘 입고 다니는지 신경도 안 쓰느냐" 아들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안 되겠다. 내가 며느리 옷 한 벌 사줘야겠어. 여기 많지는 않지만 네가 좋아하는 옷 한 벌 잠만 하도록 해라.” 재호 아내는 미리 준비한 두툼한 봉투를 지연이 손에 쥐여 주었다.

“어머니! 괜찮아요, 저 옷 많이 있어요.”

“많긴 뭐가 많다고 그래, 그리고 앞으로 며느리 옷은 이 시어머니가 맡는다, 지연아! 알았지”

“감사합니다.” 재호 아내는 이번 행사가 아들 부부 사이가 좋아지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4월 10일


이천 집에 내려온 재호의 아내는 들어서자마자 옷도 벗지 않고 집안 곳곳을 둘러보고 살핀다.

혈관에 좋다는 마늘즙을 한 짐 풀어놓으며 당장 한 팩을 뜯어 남편의 코밑에 들이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그토록 무심하게 구는 남편에게 이렇듯 정성을 들이는 여자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평생을 남편과 자식밖에 모는 여자다.'

“그래 지연이는 요즘 어때? 통화 좀 해봤소?”

“그 후로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통화도 했고 지연이가 당신 안부도 물어봅디다.”

"여기 한번 내려오라고 해요, 아버지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

“여보 다음 주는 내가 올 수 없으니 당신이 올라오세요.”

“그때 상황을 봐야겠는데. 혹시 모처럼 낚시 갈 수도 있어.”

“여기서 그렇게 혼자 청승 떨지 말고 자주 좀 올라와 가족들에게 신경 좀 쓰도록 하세요.”

“아니 내가 신경 써줄 일이 뭐가 있다고, 자기들 다들 잘 지내고 있지 않아?”

“아들하고 며느리가 저러는 것도 우리가 신경을 못 써준 탓도 있지 않은가 싶고 손자들도 자주 얼굴을 봐야 정이 들지 않겠어요? 다른 집들은 손자 보는 재미로 어떻게 늙어가는지도 모른다는데, 얘들이 표현은 안 해도 섭섭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는 친구들이 손자 사진들을 핸드폰에 깔아놓고 자랑하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들이 생각났다.

“그럼 얘들한테 주말에 이곳으로 내려오라고 하구려.”

“그러고 싶어도 할아버지가 하도 근엄해서 무섭기도 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보이는데 오고 싶어 하겠냐고요.” 그는 알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귓등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는 아내와 함께 수산시장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낙지 멍게, 해삼을 사 들고 들어왔다. 뜰에 같이 앉아 노을 지는 산을 쳐다보고 있자면 이제까지 살아온 기억들이 저 밑에서 스멀스멀 거리며 가슴을 저미어온다. 평온한 분위기와 좋아하는 안주 앞에서 아내는 행복해 보였다.

"여보 우리 이제는 좀 편하게 살아도 되지 않아요? 사실 우리 같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도 드물어요. 나는 지금이 행복하거든요. 이렇게 당신과 같이 석양도 바라보며 한잔 하는 모습이 스스로 황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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